2010년 여름 북유럽 여행기: 제 3일

일단 일어난다. 방에 나 혼자다. 세수하고 머리를 감고 아침 식사를 찾으러 간다. 호스텔에 부탁한 아침 식사는 샌드위치, 시리얼, 차가 나왔다. 7유로에 이 정도라는 게 아깝긴 하지만 양 자체는 많았던 편. 차 한 잔을 걸치고, 대강 짐을 챙겨서 헬싱키 역으로 걸어 나왔다. 오늘 가 볼 곳은 핀란드 철도 박물관, Heureka 과학관, 그리고 수오멘린나 해상 요새이다. 나라는 인간이 철도 박물관을 놓칠 리는 없고, 과학관은 개인적인 호기심, 수오멘린나는 꼭 보고 가야 할 곳이다.

방문 순서는 반쯤 의도적으로 조정했다. 철도 박물관이 제일 북쪽, 과학관이 그 다음, 수오멘린나는 헬싱키 중심까지 들어왔다가 나가야 한다. 철도 박물관으로 가려면 히빈캐(Hyvinkää/Hyvinge) 역까지 통근 열차를 타야 하고, Heureka로 가려면 티쿠릴라(Tikkurila/Dickursby), 수오멘린나로 가려면 카우파토리(Kauppatori/Salutorget)에서 페리로 접근해야 한다.

철도 박물관은 히빈캐 역에서 내려 남쪽으로 좀 걸어 가면 선로 주변에 있으므로 쉽게 보인다. 헬싱키 통근 열차의 T/H/R 노선이 히빈캐에 서며, T는 헬싱키-리히매키까지 전역 정차, H/R은 중간역을 건너뛴다. T나 H는 타고 싶어도 발에 채이는 게 R 노선이다 보니 그걸 타려는데… 일부 R 노선은 리히매키에서 탐페레까지 간다. 우리나라로 치면 천안 급행 중 몇 편성을 대전역으로 내려 보내는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운행을 하려면 열차 속도가 빨라야 하고, 그래서인지 R 노선은 전부 Sm4로 운행한다. R이라고 쓰여 있는 차를 타고 올라간다. 통근 열차 타는 곳에는 SMS 티켓 광고가 있다. 문자 메시지를 특정 번호로 보내면 2유로짜리 티켓이 폰으로 들어오고 이게 표 대신 사용 가능하다.

왼쪽부터 Sr1, Sr2, Sm4

Sm1(2?), Sm4

Sm3, Sr1. 아래쪽에는 통근 열차 SMS 티켓 광고가 있다.

이제 히빈캐 역에 내려서 남쪽으로 걸어간다. 내가 타고 왔던 Sm4는 2+3에 저상 열차이다. 승객 탑승 편의성을 위해서는 승강장을 높이거나 열차를 낮추어서 열차 내 좌석과 승강장의 높이를 맞추는 방법이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서 시도되는 방법은 주로 전자였기에 열차를 낮춘다는 말 자체가 우리나라 철도계에서 생소하다. Sm4는 열차를 낮춘 케이스이다.

Sm4 사진을 보면 창문 높이가 출입문 주변은 낮고 대차 및 운전석 주변은 높으며, 출입문과 승강장 높이가 거의 비슷하고, 천정부가 우리나라 전동차류보다 더 두꺼움을 알 수 있다. 전장품이 죄다 위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실제 열차를 타 보면 차 내부에 계단이 있고, 저상부에 휠체어 탑승 공간이 있다. 전장품을 위로 올려서 얻는 장점은 동파 방지도 있다. 선로에 쌓인 눈이나 냉기가 차량 하부보다는 상부에 영향을 더 적게 주며, 여기는 북위 60도를 넘기는 핀란드다.

핀란드 철도 박물관은 유레일 패스가 있으면 무료로 입장 가능하다. 크게 실내 및 여러 실외 전시실로 나뉘어 있으며, 실내에는 기념품 판매점 및 정태 보존 중인 차량, 실외에는 핀란드 철도 역사관 및 운행 가능한 차량이 있다. 과거 핀란드에서 사용하였던 증기 기관차 및 디젤 차량, 철도 신호기 모형, 철도역 관제실 모형이 있다. 핀란드 쪽 증기 차량 계보는 잘 모르기 때문에 역사관이 있는 바깥쪽으로 나왔다.

핀란드에 철도가 처음 깔린 시기는 제정 러시아 시기였고, 이 때문에 1524mm 러시아 궤간 및 우측 통행을 현재에도 사용한다. 1918년 핀란드가 독립한 이후에도 1524mm 궤간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해안가부터 시작하여 내륙으로 철도가 설치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면서 핀란드 동부 영토를 소련에게 뜯긴 때에도 철도 노선 자체는 연장되었다. 이후 전철화, 고속화, 복선화 등을 거쳐서 현재 핀란드의 철도망이 완성되었다.

역사관에서 볼만한 것은 궤간 비교 모형, 과거에 사용하였던 행선판, 철도역 모습, 철도원 복장 등이다. 글자 형태로 미루어 보아(러시아 혁명 이후 경음 기호 Ъ가 대부분 경우에 빠졌지만, 여기 있는 행선판에는 경음 기호가 들어가 있다) 꽤 오래된 유물부터 지금 사용하는 행선판까지 다양하게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박물관을 빠져나오는데 어린이용 기차 모형 코너에 신칸센이 있는 걸 보고 경악했다. 이건 뭐. Heureka로 가기 위해 여기를 빠져나와서 티쿠릴라 역으로 내려간다.

히빈캐 역. 역 건물 하나 있고 승강장끼리는 다리로 이동 가능.

핀란드 철박 정문

Dm6(7?) 디젤 동차. 부수차는 아니겠지.

증기 기관차

역 관제실 모형

협궤, 표준궤, 광궤. 핀란드의 궤간은 1524mm이다.

핀란드에 시대 순으로 개통된 철도. 2차 세계 대전 이후 영토의 변화가 보인다.

과거 행선판

어 왜 여기에 신칸센이 있지

한국에서 과학관을 가서 그다지 좋은 경험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Heureka 과학관 구경은 나름 기대가 되었다. 티쿠릴라 역 승강장 구조는 상당히 독특하여, 헬싱키행 열차는 무조건 1번 승강장에 서고 2번부터 7번까지는 티쿠릴라 이북으로 올라가거나 당역 착발 열차이다. 1번 승강장은 버스와 평면으로 연결되어서 좋지만 나머지 승강장은 그렇지 않다. 헬싱키로 내려오는 열차를 타고 티쿠릴라 역으로 갔기 때문에 Heureka까지 가기는 쉽다.

과학관은 실내와 실외로 나뉘어 있으며, 실내는 상설 및 특집 전시관, 그리고 농구하는 햄스터가 볼거리다. 내가 갔을 때의 특집 전시관에서는 범죄 수사를 다루고 있었고, 농구하는 햄스터는 Heureka에서 직접 기르면서 공을 주고받고 골대에 넣는다. 아 물론 앞에서 죄다 핀란드어로 말해서 해설은 못 알아들었지만, 대강 보니 한 골 넣을 때마다 먹을 걸 받는다.

어지간한 전시물들은 핀란드어/스웨덴어/영어/러시아어로 되어 있었고, 개방된 공간에 있는 모니터들은 화면을 반으로 나눠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화면을 출력시키는 배려를 하였다. 학교 근처에 있는 대전의 국립중앙과학관과는 확실히 비교된다. 과학관 안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실도 있었고, 이건 내가 갔을 때는 열리지 않았다. 과학관 밖에 있는 놀이터에도 재미난 장난감과 암석이 좀 전시되어 있었다. 월요일 오후, 방학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꽤 많이 왔다.

정문

과학관 1층 개방된 공간

실험실

과학관 외부 놀이터

야외 암석 전시

Heureka를 둘러보고 나서 수오멘린나로 내려간다. 오후 2시라 그런지 초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땀이 엄청 났다. 역 앞의 혼란스러운 카우파토리 광장을 헤쳐 나가면 수오멘린나로 가는 페리가 있다. 카우파토리 광장으로 가는 길은 그냥 바닷가고, 거기서 먹을것들을 팔고 있다. 바닷가라는 특성상 갈매기들이 자주 유람을 오시고, 덕분에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는 갈매기 주의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페리 하나는 HKL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값이 싸지만 순수한 운송 수단으로만 사용하고, 이 외에도 여러 관광 회사에서는 페리+관광 상품을 같이 팔고 있다. 난 돈 없는 여행자다 보니까 HKL 페리를 타고 그냥 수오멘린나로 왔다.

수오멘린나는 핀란드가 스웨덴령이었던 시절에 군사 요새로 건설되었다가, 이후 러시아가 접수하면서 러시아군 요새로 용도 전환되었고, 현재는 평소에는 민간 주거지로 사용되다가 비상시에만 군사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곳곳에 핀란드 국기가 걸려 있고, 심지어 이 안에는 민가도 있다. 헬싱키의 다른 부분과는 달리 지번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

돌로 포장된 길이 대부분이며, 해안 경치와 과거 군사 요새의 흔적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한 곳에서는 지금은 쓸 수도 없어 보이는 과거 대포의 유적이 보이고, 다른 곳에서는 보트를 타고 관광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주거 지역과 관광 지역은 분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민가 주변에는 민가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었다. 섬을 산책하는 곳곳에도 민가가 보였다. 수오멘린나 박물관은 하필 내가 도착했을 때 닫아 버려서 거의 산책만 하다가 돌아왔다. 이 때가 저녁 6시쯤이었는데 목이 말라서 죽는 줄 알았다.

헬싱키에 도착한 첫 날 갔던 골든 락스를 다시 가고 싶지 않기도 했고 거기 피자가 영 내 취향이 아니라서 그 근처 지하에 있었던 또 다른 피자집으로 갔다. 헌데 이게 고생의 시작이다. 골든 락스는 음료수도 무제한이었지만, 거기는 뷔페 입장료는 싸지만 음료수는 돈 주고 사야 했다. 골든 락스는 살짝 비싸지만 음료수는 그래도 공짜다. 피자 자체는 이 집이 더 내 취향에 잘 맞았지만, 당시 엄청 목이 말랐기 때문에 배가 고팠음에도 불구하고 피자가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한 판 정도만 간신히 먹고 호스텔로 되돌아갔다. 피자 맛은 괜찮았지만 이런 상황 때문에 좋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

수오멘린나 방면 HKL 페리에서

수오멘린나 선착장

관광객을 위한 이정표

왼쪽: 수오멘린나 박물관

과거 군사 요새였음을 보여 주는 대포의 흔적

사람들로 북적이는 카우파토리 광장

자 이제 헬싱키에서는 마지막 한 밤을 보내고, 내일 오전에는 투르쿠로 갔다가 저녁에 탐페레를 경유하여 로바니에미로 가는 야간 열차를 탄다. 수오멘린나에서 체력을 많이 써서 그런지 씻고 나니 잠이 저절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