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이후로 업데이트가 없었던 다른 Akademy 여행기를 이제 쓸 시간이 되었다. 2014년의 Akademy는 예년과는 다르게 9월 초순에 열릴 예정인데, 문제는 추석 연휴가 이 때를 관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 수 있을지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2013년까지의 여행기를 빨리 써 두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2011년 늦봄부터 대학원 진학 준비를 시작했기 때문에 2011년 여름에는 시간을 많이 내기 어려웠고, 그래서 2011 Desktop Summit을 전후로 한 독일 여행은 그렇게 오래는 다녀오지 못했다. 시간이 워낙 오래 지났기 때문에 그 때의 기억은 좀 지워지기도 해서 2011년 이후 여행기는 2010년 여행기만큼의 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기억이 나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써 볼 것이다.
2011년 Desktop Summit는 2009년 그란 카나리아 이후로 두 번째로 열린 KDE와 GNOME이 힘을 합쳐서 연 컨퍼런스이다. 공식 일정은 2011년 8월 5일부터 1주일간이었다. 여행 준비를 하면서 2010년까지 사용했던 캐논 A95(카나리아 제도의 태양열에 CCD가 맛이 갔던)의 가장 불편했던 점이 AA 건전지 4개였고 북유럽을 돌아다니면서 건전지의 부족을 제대로 느꼈기 때문에, 2011년에는 가급적 리튬 충전지를 사용하는 카메라를 들고 나가고 싶었고 그 결과 카메라를 니콘 P300으로 교체하였다. 8월 5일 KLM 암스테르담 경유편으로 베를린 테겔 공항까지 갔고, 베를린 테겔에는 밤 늦게 도착했지만 동행을 찾을 수 있어서 호스텔까지는 문제 없이 갔다.
컨퍼런스가 열렸던 장소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였다. 기억이 남아 있는 2012/2013년과는 달리, 2011년의 데스크톱 서밋은 그놈, KDE, 다른 데스크톱 환경 사람들의 발표가 섞여 있었고 또한 그만큼 일정의 밀도가 높았다. 당시에는 흥미 있었던 발표를 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사진을 기반으로 해서 기억을 되살릴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첫 발표는 인텔의 Dirk Hohndel이 했고, 인텔에서의 오픈소스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 분은 2012년과 2013년 Korea Linux Forum 때에도 한국을 찾았던 적이 있었다. 다음으로 들었던 두 개의 발표는 새로운 사람들을 어떻게 찾고 이들과 잘 어울리는 방법에 대한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발표였다. 팀이 커지다 보면 어디를 가든지 문제가 생기게 되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인텔은 2011년 당시 큰 스폰서였고 행사장 곳곳에서 인텔 로고가 찍혀 있는 클럽-마테를 볼 수 있었다. 여름의 베를린은 은근히 더워서 음료수가 꽤 큰 도움이 되었다.
오후 첫 발표 중에는 WebKit의 Clutter 포팅 이야기를 들었고, 당시 Collabora에 재직 중이었던 허준회 님이 발표의 절반을 진행하였다. 2009년 Desktop Summit에서 처음 만난 이후 베를린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 발표가 끝난 다음에는 Qt가 KDE에 하는 기여에 대한 발표를 들었다. 지금이야 풉 망해버린 노키아지만, 당시의 노키아는 Qt를 가지고 무언가를 하려는 의지가 강했고, 그 때의 장밋빛 로드맵은 비록 완벽하게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모바일에 대해서는 Jolla와 블랙베리 10에서 그 흔적을 지금도 찾아 볼 수는 있다. 오후 발표의 끝을 장식했던 것 중에는 그놈/KDE 학생 개발자들의 성과를 소개하는 것이 있었으며, 그 때의 충격은 상당했기 때문에 2011년 가을에 제주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저녁의 발표는 저작권 양도에 관련된 패널 토론이었고, 이 발표를 다 듣고 나니 오후 7시가 되었다.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는 1810년에 설립된 베를린 시 중심에 있는 대학교이며,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빌헬른 폰 훔볼트의 전신상을 학교에서 찾을 수 있었다.(학교의 이름은 이 두 형제에서 붙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를린 분단 당시 이 학교는 동독/동베를린에 속했으며, 서독에서는 베를린 자유 대학교를 비슷한 목적으로 설립하게 되었다. 공산 동독의 엘리트 학교였던 훔볼트 대학교는 독일 통일 이후 교수진이 완전히 교체되는 등 공산 체제의 영향을 지우고 현대적인 학교로 모습을 바꾸고 있다.
학교 주변에는 막심 고리키 극장, 브란덴부르크 문 등 베를린 시내의 큰 볼거리가 많이 있었고 숙소 또한 시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첫날에는 별다른 파티가 없었고, 오전부터 오후까지 길게 이어진 일정을 소화한다고 일찍 들어가서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