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여름 북유럽 여행기: 제 5일

아침 6시 가까이 되어서 잠에서 깼다. 자고 일어나서야 샤워실은 검은색 키로 연다는 걸 알아채는 바람에 일단 아침 일찍 씻었다. Edm 침대차에 부속된 샤워실은 따뜻한 물은 나온다. 원래 침대차 내 샤워실이 다 그렇듯이 공간은 꽤나 협소한 편이다. 대부분 Edm 침대차는 뽑은 지 5년도 안 된 완전 새삥이기 때문에 샤워실 청결도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전 8시쯤 로바니에미 역에 딱 도착했고, 위층에서 자던 사람이 물을 안 먹어서 당장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물 득템. 안내방송 그런 거 없기 때문에 내릴 때 우루루 내리면 된다.

로바니에미 역

Edm 침대차

로바니에미 역 뒤편

역 뒤에 있는 Tk3 증기 기관차

당장 8시에 로바니에미에 도착하긴 했는데, 시내에 있는 모든 식당은 문을 아직 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역이 도심에 근접한 것도 아니라서 로바니에미 역 위에는 증기 기관차밖에 안 보인다. 내가 찾은 루돌프 호스텔은 하룻밤 묵는 데 무슨 3~40유로(싱글 룸)씩이나 하는 바람에 로바니에미에서는 하룻밤만 지내기로 했다. 체크인 시간의 압박으로 짐까지 들고다니느라 고생 좀 했다. 이번 여행 동안 대부분 호스텔들은 체크인 시간 이전에도 짐을 맡아 준다는 사실을 몰라서 도시를 이동할 때 고생 꽤나 했다. 북극권을 오전 일찍 건너고 아르크티쿰 박물관을 보고 온 다음, 호스텔에 짐 풀고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로바니에미 역 앞에서 산타 마을로 출발하는 8번 버스 시간표는 정류장 밑에 붙어 있다. 시내를 통과하면서 몇몇 사람을 태우고 공도를 달려서 산타 마을로 간다. 인구 수는 적은데 땅은 넓다보니 지나가는 차나 사람 찾기가 힘들다. 우리나라에서는 볼래야 볼 수 없는 풍경. 산타 마을에는 진짜 산타가 사는 집이 있고(여기서 사진 촬영은 불가능) 북극권 인증을 할 수 있도록 금까지 그어 놓았다.

산타 마을 입구

북극권 코앞. 여러 도시간의 거리를 나타낸 표지판.

북극권 밟기 인증

산타의 집 입구

나도 Qt 스티커 하나 붙이고 돌아옴

북극권을 따라 놓여 있는 램프

버스 정류장

산타 기념품 가게를 뒤로하고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서 와플 한두개로 아침을 때웠다. 사촌동생 선물을 보러 갔던 스와로프스키 가게에서 핀란드의 1/2센트 동전을 무료로 증정하고 있었다. 대부분 유로 통용국과는 다르게 핀란드에서는 5센트 미만은 반올림하거나 버린다. 그래서 1/2센트 동전은 도안이 존재하고 유럽 중앙 은행 규정 때문에 동전을 발행해야 하지만 실제 유통되는 동전은 많지 않다. 다른 나라의 1/2센트 동전은 핀란드에서 사용할 수 있다. 시내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에 와플 한두개는 배고픔을 금방 달래 주었다. 산타 마을 주변은 숲밖에는 볼거리가 많지 않아서 버스를 타고 역 주변으로 돌아갔다.

로바니에미에 있는 세계 최북단 맥도날드

로바니에미 시내

시립 미술관이 공사 중이어서 둘러볼 수 있는 박물관 중에는 아르크티쿰 박물관이 제일 크다. 이름처럼 핀란드 북부의 생활상을 전시해 놓고 있었고, 노르딕 국가 북부 지방의 원주민인 사미 족에 대하여 깊게 다루고 있다. 사미 족은 남쪽에 있는 사람들과는 생활 양식이나 언어나 민족과 문화가 달랐기 때문에 과거에는 억압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러한 모습이 많이 변했다. 사미 족의 주거지는 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러시아 일부에 걸쳐 있으며, 이들 나라의 국립 박물관은 항상 사미 족의 생활을 다루고 있다.

아르크티쿰 박물관 입구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명판

이 외에도 지구 온난화로 핀란드 북부 지역이 어떻게 영향을 받고 있는지도 다루고 있다. 태평양 한가운데의 섬 입장에서는 주거지가 물에 잠기는 등 재앙이지만, 멀리 북쪽에서는 얼음에 봉인되어 있던 각종 자원의 봉인이 해제되고 항로가 뚫리는 등 이득도 보고 있다. 하지만 북극에 살고 있는 각종 생물의 삶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긍정적으로만은 볼 수 없다. 내가 갔을 때의 특집 전시 중에는 술이 있었다. 핀란드 북부는 날씨가 추워서 사람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술을 많이 마셨고, 술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핀란드 정부는 여러 조치를 취했다. 지금도 노르딕 국가에서 시행되는 국가의 주류 독점 제도는 모두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당시에 유통되었던 주류라든가, 주류를 구입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이런저런 허가증이 전시되어 있다. 술 마시면 심신미약으로 형이 감경되는 어떤 나라에는 이런 걸 도입하지 못하겠지. 당장 소주도 알코올 농도 4.7% 이상이잖아.

호스텔 체크인을 맞추기 위해서 아르크티쿰에서 적절히 시간을 때운 다음 시내 중심으로 갔다. 특이하게도 도심을 관통하는 도로는 모두 비포장이다. 9유로 주변에 배를 채울 수 있는 중식 뷔페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골든 락스에 질려 있었기에 맛있게 먹었고, 유럽 어디를 가나 저렴한 중식 뷔페가 있어서 배 채울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로바니에미에는 세계 최북단의 맥도날드가 있지만, 핀란드의 다른 패스트푸드가 그렇듯이 가격대 성능비가 안 좋아서 보는 걸로 만족했다. 일단 이걸 끝내고 루돌프 호스텔에 체크인을 하기 위해서 산타클로스 호텔로 갔다.

루돌프 호스텔은 독립적인 체크인 시설이 없는 완전 기숙사형 호스텔이라서 밑에 있는 산타클로스 호텔에서 체크인 및 아침 식사를 제공한다. 호텔에서 운영하다 보니 방값도 장난 아니게 비싸서, 로바니에미에서는 하룻밤만 자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사실 도시도 작아서 볼 것도 많이 없다. 루돌프 호스텔에 체크인하고 방 열쇠를 받은 다음, 스톡홀름에서 뭐를 볼지 보려고 노트북을 펼쳤는데… 방에서 무선랜이 안 잡힌다. 스톡홀름에서 지낼 호스텔은 예약해 두었지만 관광지 정보를 알 수 없으니 낭패다. 침대차에서 푹 잘 수 있었지만 오전에 돌아다닌다고 체력 소모가 커서 일단 낮잠을 좀 잤다.

여기가 바로 루돌프 호스텔

여기가 바로 루돌프 호스텔

자고 일어나서 로바니에미 시내를 좀 둘러 보았다. 로바니에미 시내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조성되었다. 핀란드는 소련을 몰아내기 위하여 독일과 동맹을 맺었고, 독일과 동맹을 맺은 결과는 패전이었다. 소련과의 평화 조약 중에는 독일군을 핀란드 밖으로 몰아낸다는 것도 있었고, 독일군은 핀란드에서 철수하면서 이런저런 피해를 남기고 갔다. 핀란드 북부의 큰 도시 로바니에미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후 복구 과정에서 시내에 이런저런 기념비를 건설하였고, 기념비 근처에는 로바니에미의 이런 역사를 담고 있는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핀란드 철도의 가장 북쪽에 있는 전철화된 역도 바로 로바니에미 역이다. 여기에서 더 동쪽으로 가면 더 작은 케미얘르비가 나오고, 더 동쪽으로 가다가 러시아 국경선을 앞두고 끊긴다. 과거에는 러시아와 연결되어 있었으나 수요 문제로 폐선되어, 지금 핀란드와 러시아를 잇는 철도 노선은 남부에 하나 있다. 로바니에미 동쪽으로 가기 위하여 케미 강을 건너는 다리도 전후에 복구되었다. 오후 5~6시쯤 되었으나, 어지간한 공공 시설은 문을 닫았고 날씨도 추워지기 시작해서 호스텔로 돌아왔다.

시내 곳곳에 있는 조형물

로바니에미에서 동쪽으로 가는 철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복구되었고 전철화는 안 되어 있다.

시립 도서관

밤이 깊어가는데도 해가 질 생각을 하지 않아서 블라인드를 완전히 내리고 창을 완전히 닫고서야 겨우 잘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탐페레는 그래도 12시 주변이 되면 해가 살짝 지는 척이라도 하지, 북극권에 인접한 로바니에미는 그런 거 없다. 룰레오발이라고 착각했던 우메오발 스톡홀름행 쿠셰트 티켓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무선랜이 터지지 않으니 론리플래닛 책을 봐 가면서 스톡홀름에 도착하고 호스텔로 가기 직전까지 볼 장소를 찾아 보았다. 미리 받아 놓은 케미-룰레오 버스 시간표도 다시 한 번 확인해 놓고 잤다. 스톡홀름까지 가는 길이 생각보다 험난하고 오래 기다려야 하는데다가 스웨덴 쿠셰트는 편안함은 엿 바꿔먹은 물건이란 걸 알게 되기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