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루돌프 호스텔에서 일어나서 산타클로스 호텔로 내려가 아침을 먹었다. 호텔 뷔페를 이용하는 거라서 가격은 비싸지만, 호스텔에 투숙하고 있으면 11유로에 이용할 수 있다. 청어나 연어 같은 물고기도 보였고, 핫케익 제조용 틀도 있어서 그걸로 배를 채웠다. 오늘은 저 남쪽 스톡홀름까지 내려갈 예정이어서 아침을 든든히 먹어 두기로 했다. 로바니에미는 핀란드 북쪽 끝에 있고, 인구 수도 많지 않기 때문에 야간 침대차를 제외한 여객 열차는 빈도수가 그렇게까지 많지 않다.
핀란드에서 스웨덴이나 그 반대로 가려면 시간 문제 때문에 페리를 주로 이용하지만(헬싱키에서 저녁에 타면 스톡홀름에 아침에 도착함) 나는 열차편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헬싱키에서 일단 케미까지는 올라와야 스웨덴과 연결되는 철길이 있다. 그나마도 궤간 문제 때문에 국경역인 토르니오/하파란타 역에 4선궤가 설치되어 있어서 환승이 불가피하다. 오래 전에 여객 열차는 영업을 중지했고, 유레일 패스를 가지고 있으면 케미-토르니오/하파란타 간을 버스로 이동할 수 있다. 토르니오 역은 콜라리 방면 선로와 케미 방면 선로가 스웨덴 방향으로 합쳐지기 때문에 이 역에 정차하려면 차를 돌려서 나가야 하고, 토르니오 역을 대체하기 위한 역으로는 토르니오 이태이넨 역이 있다.
아침 10시에 출발하는 P 708 열차를 타고 일단 케미로 내려간다. 케미 역 바로 근처에는 버스 터미널이 있어서, 거기에서 토르니오/하파란타로 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 대부분 버스는 토르니오 종착이고, 기사에게 요청을 하면 하파란타까지 갈 수 있다. 핀란드의 P 열차는 우리나라로 치자면 대강 폐지되기 직전의 통일호 같은 느낌이라서 가장 오래된 객차가 편성되고 주로 단거리를 운행하며 전역 정차하지만, 침대차가 P 등급으로 편성되는 아햏햏한 면도 있다. 열차에 탔는데 시간이 일찍어서였는지 객차 한 칸을 전세내서 케미까지 내려왔다.
케미 버스 터미널로 가 보니 아주 낡은 버스 한 대가 토르니오라는 팻말을 달고 있었다. 거기에 올라탄 다음 유레일 패스를 보여 주면 공짜로 탈 수 있다. 버스 안에는 마르카 동전을 받는 NMT 공중전화 단말기가 있다. 마르카가 유로로 대체된 지 거의 10년이 되었으므로, 이 버스는 꽤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의 모든 도로가 2차선인 핀란드의 라플란드를 헤쳐나가는 동안 반쯤 공기로 이동하다가, 약 40분 후 토르니오에 도착했다. 토르니오와 하파란타는 원래 한 도시였다가 1800년대에 핀란드가 러시아 지배를 받으면서 새 국경선이 그어져서 갈라졌다. 이후 핀란드가 독립하고 노르딕 여권 연맹이 체결되면서 국경 검문소의 기능이 약해졌고, 솅겐 조약이 발효된 현재는 옛날 국경 검문소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 버스를 타고 하파란타까지 갈 때에도 국경 검문소는 보이지 않았다.
하파란타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기 직전에는 이케아 가게가 있는데, 가게 자체는 스웨덴에 있지만 핀란드어로도 안내가 쓰여 있고, 스웨덴 크로나와 유로를 모두 다 받는다. 스웨덴은 핀란드보다 1시간 빠르기 때문에 핀란드 시각으로 12시 55분이 스웨덴 시각으로는 11시 55분이 된다. 핀란드에서 토르니오로 운행하는 여객 열차가 없듯이, 스웨덴에서도 하파란타로 운행하는 여객 열차가 없다. 유레일 패스를 사용하면 하파란타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역이 있는 룰레오까지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 여기서 큰 실수를 했는데, 룰레오에서 스톡홀름으로 가는 야간 기차는 6시에 출발한다. 하파란타에서 룰레오로 가는 버스는 12시와 13시 35분에 있는데, 룰레오는 생각보다 작아서 굳이 오래 있을 이유가 없었다. 바로 간다고 12시에 하파란타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탔던 게 조금은 후회된다. 어쨌든 버스는 내가 내린 바로 그 곳에서 대기하고 있다.
버스 자체는 2층이지만 탑승한 승객은 나 포함 그리 많지 않았다. 버스 자체는 룰레오를 지나 우메오까지 운행하지만 유레일 패스로 탑승할 경우 룰레오까지만 무료 이용이 가능하다. 스웨덴의 라플란드 역시 핀란드와 경치가 다를 바 없이 숲 속에 2차선 도로가 있고, 차나 사람이나 거의 없기 때문에 제한 속도가 높다. 슬슬 핀란드에서 샀던 SIM 카드가 신호를 잃어버려서 룰레오 도착 이후 SIM 카드를 사기로 했다. 휴대폰은 알람 시계와 A-GPS 비콘의 역할을 충실히 해 주기 때문이다.
룰레오 버스 터미널에 내리면 바로 앞에 기차역이 있다. 역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역 자체는 이미 무인화되어 있었고, 승강장에는 여러 Rc 기관차와 IORE 기관차, 그리고 객차가 보였다. 룰레오 도착은 14시 25분이고, 스톡홀름행 야간 열차는 6시에 출발하므로 시간은 많다. 룰레오 시내를 둘러보면서 가지고 있던 유로 지폐를 스웨덴 크로나로 환전하고, 점심 겸 저녁을 룰레오 시내의 태국 식당에서 해결했다. 1 크로나는 약 10유로이기 때문에 핀란드 쪽에서 보던 숫자에 *10을 하면 대략 스웨덴 쪽에서 보이는 가격이 나온다.
이쯤에서 내가 투르쿠에서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룰레오와 우메오를 헷갈려서 룰레오에서 16시 32분에 타야 할 열차인데 우메오에서 18시에 탄다는 걸로 착각하고, 쿠셰트와 침대차를 착각해서 잠도 불편하게 잤다. 쿠셰트는 낮에는 좌석으로 쓰다가 밤에는 좌석을 접어서 침대로 쓰는 방식이고, 침대차는 원래 침대가 들어 있는 차다. 좌석 쿠션은 침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불편하므로 쿠셰트는 오래 버틸 곳이 못 된다. 룰레오와 우메오는 서로 엄청 떨어져 있기 때문에 기차를 놓쳐 버리면 일정이 꼬인다. 아무튼 16시 32분에 룰레오에서 출발하는 야간 열차를 타고, 우메오까지는 좌석을 차지하기로 했다.
저기 보이는 기관차 중 Rc 기관차는 우리나라의 특대와 비슷한 위상을 차지하는 전기 기관차로 생각하면 된다. 도입 시기는 꽤나 오래되었지만, 7종(현재는 5종)의 파생형도 있고, 최고 시속은 135/160km이다. SJ에서는 여객, 그린 카고 등 회사에서는 화물이나 여객을 담당한다. 파생형 중 하나인 Rc2는 오스트리아에 수출되었다가, 이후 역수입되어서 사철 회사 및 반베르케트에서 쓰고 있다. 스웨덴은 동차화가 많이 진행되었지만, 아직까지도 Rc 견인 여객 열차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IORE 기관차는 스웨덴의 철광석 생산지 키루나에서 노르웨이의 항구 나르비크/스웨덴의 항구 룰레오까지 실어나르는 데 사용된다. 주 운행 노선은 당연히 오포트 선/말름 선이며, 최고 시속은 80km이지만 견인력이 커서 철광석 약 70량도 거뜬하게 끌 수 있다. 영구 2중련되어 있으며, 각각 기관차마다 이름이 붙어 있다.
사진 중에 있는 S-SSRT Rc6 1333 9174 000 0011-8 이라는 표기는 독일을 주축으로 유럽 여러 나라에 보급되고 있는 동력차 표기법의 일부로, 맨 처음 나오는 S는 스웨덴, SSRT는 반베르케트 소유를 뜻한다. SSRT 자리에는 SJ와 같은 다른 운송 회사가 올 수 있다. Rc6 1333은 과거 사용하였던 표기법이고, 9174 000 0011-8은 UIC 표준 표기법이다. 91은 시속 100km 이상 전기 기관차, 74는 스웨덴의 UIC 국가 코드, 000/0011은 차종/차종 내 식별 번호, 8은 체크 숫자이다. 현재 스웨덴의 철도 차량은 기존 표기법/UIC 표기법이 섞여 있고, 같은 Rc6이라고 해도 반베르케트 소유는 000, SJ 소유는 106으로 차종 식별 번호가 다르다. 아직까지 전 유럽에 정착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2010년 말 스웨덴 북부에 보트니아 선이 개통되면서, 기존의 노선으로 다니던 여객 열차가 보트니아 선 경유로 조정되었다. 이 때문에 야간 열차 시간표도 조정되어 7시 46분이 아닌 6시 15분에 도착한다. 이를 피하려면 룰레오에서 8시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면 10시 2분에 떨궈 준다. 내가 열차를 탔을 때에는 보트니아 선이 미개통 상태였기 때문에 스톡홀름에 7시 46분에 떨궈 주었다. 하지만 스톡홀름에 도착한 다음 뭘 해야 하지? 호스텔만 예약해 놓았고, 로바니에미에서 조사하기로 했던 스톡홀름 관광지는 무선 인터넷이 안 통해서 조사해 놓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스톡홀름 역에서 노숙자 생활을 할 수도 없는 거고. 에라이 몰라 일단 열차를 타고 스톡홀름까지 내려가자. 우메오를 지나고 나서 거의 곧바로 잤다.
다음날 오전 6시쯤 눈을 떠 보니 어느새 기차는 스웨덴 중부까지 내려와서, 웁살라와 알란다를 거쳐 스톡홀름에 도착할 준비를 했다. 아침의 스톡홀름 센트랄 역은 생각보다 사람들이 붐비던데다가, 야간 열차에서 제대로 못 잔 피로감까지 겹쳐서 정신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 그래도 본전은 뽑아야겠다는 각오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