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텔의 3층 침대 위에서 일어난 후, 씻고 베르겐 시내를 잠시동안 둘러보러 나왔다. 와. 베르겐 시내는 생각보다 상당히 작았기 때문에 관광할만한 지점 몇개만 둘러보고 바로 장거리 여행으로 코펜하겐으로 빠져나가기로 했다. 브뤼겐으로 걸어 나가는 길에 있는 한자 동맹 박물관에서 여행을 시작하였다.
베르겐은 과거 한자 동맹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해안가에서 어업이 발달하였다. 그 시기를 다룬 한자 동맹 박물관이 베르겐에 있고, 또한 한자 동맹이 활동하였던 브뤼겐 지역은 UNESCO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브뤼겐 박물관은 브뤼겐 지역의 생활 모습과 브뤼겐에서 사용되었던 항해용 선박 등이 전시되어 있다. 브뤼겐으로 가는 길에는 과거 한센병 환자 수용소로 사용되었던 한센병 박물관이 있었고, 과거 비인간적인 치료 방식에서 병원균이 발견된 이후 변했던 치료 방식까지를 다루고 있다. 브뤼겐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는 플뢰위엔 산을 올라가는 플뢰이바넨 산악 철도가 운행하고 있으며, 내가 갔을 때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있어서 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이후 노르웨이의 해양 역사를 다루는 베르겐 해양 박물관을 돌아보고, 시내에서 이것저것을 하다 보니까 오후 5시가 되었다. 훤한 대낮이긴 하지만, 박물관들이 그쯤에는 문을 닫기 때문에 별 수 없었다.
역으로 들어가기 직전 최근 개통된 베르겐 경전철 Bybanen을 보았다. 베르겐 경전철이 도심에서 출발하여 교외의 주거지를 거쳐 가는 노선이라서 관광객이 탈만한 노선은 아니지만, 노선 자체는 볼만했다. 도심지에서는 노면 전차로 다니고, 도시를 벗어나면 기차 수준의 전용 궤도를 사용한다. 내가 본 구간은 도심 쪽이다 보니 노면 전차와 다를 바가 없었다. 헬싱키와는 다르게 굳이 시간을 들여서 타 볼 생각이 별로 들진 않았기 때문에 차량이 들어오는 것만 보고 지나갔다.
지금까지 다 둘러본 것이 오후 5시 정도였고, 야간 열차가 출발하기까지는 5시간 정도 빈 시간이 있었다. 처음에는 베르겐 역에서 5시간을 버티려고 했으나, 기다리다 보니까 이건 할 짓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역을 벗어나려고 할 때 신기한 철도 차량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우선 73 전동차가 들어와서 사람들을 오슬로로 실어나르고 있었고, 그 다음 ‘적어도 나는 보지 못한’ 플롬 선 기관차 회송이 보였다. 양쪽 끝에 El 17 기관차가 달려 있었고, 중간에는 영락없는 B3 객차의 플롬 선 개조판이다. 플롬 선 차량을 플롬이 아닌 이곳에서 보니까 왠지 반가웠다.
호스텔로 다시 가서 공짜 저녁 와플을 즐긴 다음, 다시 역으로 돌아와 보니 야간 열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잘 준비를 하는 동안 NSB Interaktiv Wi-Fi를 잡아 보았다. 예상대로 차내 무선 인터넷은 유료였으며,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정보는 구글 지도와 연동된 현재 열차의 위치 및 예상 소요 시간과 객차 시설 안내 정도밖에 없었다. 문득 KTX 차내 무선 인터넷 서비스도 단순히 인터넷만 되는 게 아니라, 음영 구간에서 즐길만한 서비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차가 출발할 때쯤 잠이 들었고, 일어나니 오슬로에 도착해 있었다. 그 때가 새벽 6시.
여기서 코펜하겐으로 가려면 기차로 예테보리로 간 다음 갈아타야 한다. 오슬로에서 예테보리로 가는 열차는 하루에 왕복 6편밖에 없다. 나머지 시간대에는 주로 버스로 운행한다. 게다가 IC 따위가 아닌 R 등급으로 편성한 걸 보면 이건 끝에서 끝까지의 수요보다는 구간 수요를 노린 것 같고, 예상대로 예테보리까지 가는 동안 물갈이가 자주 되었다. 73 전동차를 집어넣긴 했는데, 의외로 여기에서 가끔씩 제 속도인 시속 200km를 냈다. 노르웨이 국경을 넘을 때쯤에는 “Welcome to Sweden.”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고, 국경역이 무인역이다 보니 곧바로 통과했다. 스웨덴 영토를 달리다가 트롤헤탄에서 차가 섰고, 거기서부터는 버스로 예테보리까지 갔다.
비록 이번에는 볼 것이 많은 예테보리를 단순히 통과하지만, 예테보리에서는 코펜하겐으로 가는 열차가 자주 있다. 외레순 해협을 가로지르는 외레순 대교를 따라서 통근 열차가 운행하고 있고, 스웨덴 쪽 종점 중 한 곳이 예테보리다. 예테보리에서 점심을 간단히 때운 다음 이번에는 코펜하겐으로 가는 열차에 타서 적절한 자리를 잡고 코펜하겐까지 내려왔다. 그 구간에 있었던 역 중에 보스타드(Båstad) 역이 있었고, 안내 방송은 ‘bastard’와 거의 비슷하게 들렸기 때문에 거기에 처음 온 몇몇 사람이 잠깐 킥킥댔다. 말뫼 도착 이후 당시에는 차를 돌려서 코펜하겐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진출입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다. 말뫼를 일단 빠져나가면 외레순 대교로는 시원하게 진출할 수 있고, 실제 바다 위를 달리는 것은 속도감이 들었다. 이후 코펜하겐 주변에서는 공항 때문에 인공 섬을 거쳐서 해저 터널로 지나갔고, 코펜하겐 시내에 있는 역에 선 다음 호스텔 앞으로 도착하였다.
베르겐-코펜하겐. 거의 12시간에 가까운 기차 여행이었고 국경선만 두 개를 넘었다. 차창 밖으로 비치는 풍경은 워낙 다양했지만, 도착해 보니 지쳐서 호스텔에서 잤다. 기차 여행 동안 피로가 엄청났던데다가, 야간 열차에서는 앉아서 잤기 때문에 잠이 잘 왔다. 내일의 코펜하겐은 과연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