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여름 북유럽 여행기: 제 12일

오전 6시의 오슬로는 차분했다. 오슬로-베르겐 사이는 우리나라로 치면 경부선만큼 열차가 자주 다니고, 거리 역시 경부선보다 살짝 먼 오슬로-베르겐 간이 496km이지만, 그 흔한 고속 열차 하나 없고 지금도 6시간 20분이 최’소’ 운행 시간이다. 아니지, 고속 전동차가 다니긴 하지만 제 성능 제대로 못 내고 다니고 있다. 게다가 경부선과는 달리 대부분 구간이 단선이다. 그만큼 산도 많고 험한 길도 많은 구간이라서 볼거리 역시 많다고 생각한다.

베르겐 선은 오슬로 기점이 아닌 오슬로 북서쪽의 회네포스 기점이다. 따라서 베르겐 선으로 진입하려면 어떻게든 회네포스까지는 와야 하는데, 여기서 두 가지 선택지가 갈린다. 하나는 오슬로 서쪽 드람멘을 경유하여 회네포스로 진입하는 것으로, 좀 더 둘러가지만 선로 상태가 좋고 수요지도 많다. 위에 있는 496km 역시 드람멘 경유 기준이다. 다른 하나는 오슬로 동쪽 로아를 경유하여 회네포스로 진입하는 것으로, 거리는 더 짧지만 선로 상태는 상대적으로 좋지 않다. 1980년대에 오슬로 터널이 완공되기 전에는 모든 열차가 로아를 경유하여 오슬로 동쪽으로 진입했지만, 이제는 오슬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바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선로도 더 좋은 서쪽으로 진입해서 오슬로 터널을 타고 들어온다.

하지만 내가 탄 열차는 뭔가 달랐다. 승차권에 로아 경유(kjøres o/Roa)라고 적혀 있었다. 한국 와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이 구간은 여객 열차가 평소에 운행하는 구간이 아니다. 당시 오슬로 터널 공사 때문에 여객 열차 운행 구간이 조정되었고, 베르겐으로 가는 여객 열차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 베르겐은 분명히 오슬로 서쪽인데 왜 동쪽으로 열차가 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겐으로 가는 철도 여행기를 보면 대부분 사진들이 드람멘을 중간 기점으로 하는 것 같지만, 로아 쪽은 ‘여기 오슬로 주변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로아까지는 예비크 선으로 운행하며, 뭉크 박물관을 지나면서 보았던 퇴위엔 역 등이 지나갔다. 열차는 다시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회네포스 역에 정차하였다.

베르겐까지는 계속 오르막을 올라간다. 한국 철도의 최고점이 추전역의 830m 주변이라면, 노르웨이 철도의 최고점은 핀세 역의 1300m 주변이다. 힘 좋은(하지만 속도는 못 내는) El 18 기관차가 선두에서 끌어 주는 건 좋지만, 타고 있는 B3 객차는 이건 영 아니올시다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한국 철도에서 낙창식 창문 객차를 본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이 B3 객차는 내장재만 개조되었지 낙창식 창문은 그대로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산을 올라가면서 귀가 멍멍해진다는 느낌이 이렇다는 것을 제대로 알았다. 1300m 주변으로는 올라갈 일이 더더욱 없어서인지. 아침 잠은 이것 덕분에 다 깼다.

노르웨이 철도의 최고 지점 핀세 역에 도착하였다. 이 역에서는 주변 경치를 보다 가라고 10분간 정차한다. 나는 뮈르달까지 이 열차를 타고 플롬 선으로 가기 때문에 역 주변만 구경하다가 왔다.

핀세 역

핀세 역

핀세 역을 꺾으면 이제 베르겐까지는 내리막이다. 좀 더 가서 뮈르달 역에 내렸는데, 헬게이트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오전에 오슬로의 날씨가 흐렸지만, 뮈르달에서는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플롬 선 열차가 도착했을 때는 비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플롬 선 열차는 지역 사회에서 직접 운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NSB의 다른 구간보다 비용이 더 비싸며, 객차는 B3 객차를 개조하여 LCD 안내 방송 시스템을 달아 놓았다. 지정 좌석제가 아니기 때문에 열차가 도착하자마자 뛰어 들어가야 했으며, 난 캐리어도 끌고 있어서 완전히 죽을 맛이었다. 이제 열차가 뮈르달에서 플롬으로 내려간다. 경사가 급하기 때문에 운행 속도도 느리며, 실제 올라오는 열차와 내려가는 열차의 운행 시간도 다르다.

플롬 선의 주변 볼거리는 많지만, 비도 많이 오기 시작했다. 전 구간 단선이다 보니 교행역도 여럿 있으며, 노선 중간에 있는 쇼스포센 폭포에서 한 번 정차한다. 노선이 플롬을 향해 내려가면서 산을 감고 내려가는 풍경 하나로도 플롬 선을 구경할 가치는 충분하다. 단 비가 올 때는 제외하고. 비가 올 때도 산 풍경은 꽤나 보기 좋은데 갈수록 굵어지는 빗줄기가 왠지 수상하다. 뭐 일단 플롬까지 가 보자.

플롬 역 승강장

플롬 역 승강장

플롬 역

플롬 역

이제 플롬에 도착해서 비도 오기 때문에 구드방겐으로 가는 유람선에 올라탔다. 비 때문에 피오르 관광은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피오르 지형이 이런 거구나라는 느낌만 받으면서 들어왔다.

흔한 비 오는 날의 피오르

흔한 비 오는 날의 피오르

종착점 구드방겐에서는 버스를 타고 보스로 올라갔고, 보스 역에서 베르겐으로는 통근 열차로 이동했다. 구드방겐에서 보스로 올라가는 고갯길에서 난생 처음으로 21단 콤보를 봤으며, 경사도 꽤 급했다. 21단 콤보를 위에서 내려다 볼 때는 이 구간을 차량이 전복되지 않고 내려온 게 천만 다행이었다. 구드방겐-보스 사이에는 마을이나 민가가 거의 없었고, 호텔도 딱 하나 작은 게 있었다. 그래서인지 직통은 아니었지만 빨리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구드방겐 터미널

구드방겐 터미널

보스 역에서는 통근 열차로 베르겐 역으로 간다. 보스 역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저 멀리서 전동차가 기어온다. 통근 열차이기 때문에 2+3 좌석 배열에 여객 열차만큼 좌석 배치가 편하진 않다. 하지만 이미 물귀신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어서 베르겐의 호스텔로 갈 생각만 했다. 보스-베르겐 간은 내리막 경사가 꽤나 완만해졌고, 통근 열차라는 특성 상 역 같아 보이는 곳에 죄다 섰다.

보스 역

보스 역

내가 탔을 때는 NSB 69 전동차로 운행하였다. 이 차량은 1970~80년대에 도입된 전동차이다. 도색과 내장재는 개조되어 노르웨이 이곳 저곳에서 통근용으로 운행하지만, 낙창식 창문과 화장실 등은 크게 개조할 수 없었다. 당장 화장실을 가려는데, 통로가 밀폐되지 않아서 내심 엄청 불안했을 뿐만 아니라 기압 차이 때문에 터널이라도 들어간다 치면 문 여는 데 힘이 엄청 들어갔다. 전동차라고는 했지만 익숙한 올라가는 구동음이 아닌 전동기의 윙윙 거리는 소리가 객실로 들려와서 이거 가다가 사고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비에 흠뻑 젖어 있었기에 드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바깥 경치도 좀 보면서 불안감을 달랬다.

아르나 역에 도착하면 베르겐에 거의 다 왔다. 베르겐 동쪽을 가로막고 있는 울리켄 산을 가장 빠르게 통과하는 방법은 철도이다. 아르나 역은 울리켄 터널을 통과하면 바로 보이는 역이다. 도로보다 더 빠르기 때문에 1개 역만 운행하는 통근 열차도 베르겐 지역 주변에서 운행한다. 아르나 역을 지나 긴 단선 울리켄 터널을 통과하니 베르겐 역이 나를 반겨주고 있다. 69 전동차의 후덜거리는 승차감 때문에, 그 때까지만 해도 내구연한 반대론자였으나 탑승 이후 내구연한 제도의 필요성을 다시 깨닫게 해 주었고, 내구연한 찬성으로 돌아서게 해 주었다. 40년 운행? 뼈대는 못 고칩니다.

베르겐 역

베르겐 역

베르겐에서 예약해 둔 Intermission 호스텔은 지역 교회에서 여름 기간에만 임시로 운영하는 호스텔이다 보니 3층 침대라는 괴악한 물건도 볼 수 있었다. 내 질량이 질량이다 보니 2층 침대로도 올라가지 않아서 3층 침대의 꼭대기는 엄청 불안했다. 하지만 잘 공간이 있으니 그걸로 다행. 비로 젖은 몸을 씻고 젖지 않은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잠을 청했다. 오늘의 불안한 기억을 빨리 떨쳐 버리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