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헬싱키를 떠나 투르쿠를 오후에 둘러보고 탐페레 경유 로바니에미로 올라간다. 핀란드에서 유레일 패스 사용 시 IC 이하
대부분 열차는 예약 없이 탑승 가능하지만, 펜돌리노 및 야간 열차는 예약이 필수다. 오전 9시에 투르쿠로 가는 펜돌리노를
예약하고, 오후 늦게 출발하는 로바니에미행 침대차 P 265 열차를 예약하였다. 어차피 로바니에미는 헬싱키나 투르쿠 둘 다의
북쪽에 있기 때문에 침대차 요금도 아낄 겸 탐페레에서 로바니에미까지 예약하였다.
펜돌리노는 예약비 5유로 고정이고, 침대차는 이용 구간에 따라서 요금이 다르다. VR은 두 종류의 침대차를 사용 중이며,
상대적으로 구형 CEmt 침대차와 신형 2층 Edm 침대차가 있다. CEmt 침대차는 단층 구조에 1방에 3명이 들어가며, Edm 침대차는
복층 구조에 2인 1실이며, 위층이 공간이 조금 더 넓다. 아직까지 Edm 침대차는 상대적으로 수가 적기 때문에 2010년 1월
기준으로도 헬싱키-로바니에미-케미얘르비 구간만 운행 중이며, 1일 4편성만 Edm 침대차가 연결된다. P 265 열차를 일부러
시간 맞춘 이유도 Edm 침대차 때문이다. 투르쿠에서 바로 로바니에미로 가는 열차에는 Edm이 편성되지 않는다.
헬싱키에 온 목적 중 하나가 헬싱키 지하철 탑승이었기 때문에, 열차 승차권을 예약하기 전 지하철 체험을 해 보려고 좀 빨리 나섰다.
헬싱키 지하철은 1982년 개통되었고, 차량은 1979년부터 반입된 M100과 2000년
반입된 M200
차량이 있다. M100 차량은 전 세계 최초 VVVF(-RCT) 제어를 사용하는 차량이다. 헬싱키 역 바로 앞에 있는
라우타티엔토리 역에서 루오홀라티 역까지를 시간 때우기 용으로 몇 번 왕복해 보았다. 2유로짜리 표를 사면 1시간 동안 무제한으로
환승 가능하므로 이런 짓도 맘대로 할 수 있다.
그 외 기억나는 거라면 에스컬레이터가 상당히 빨랐다는 점, 헬싱키 시는 물과 가깝기 때문에 지하 구간이 꽤나 깊었다는 점이 기억에 난다. 한국의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는 솔직히 느린 편이다. 한국 속도 감각으로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가 계단이 빨리 꺼져서 당황스러웠는데, 다른 북유럽 국가 에스컬레이터 속도도 이것과 비슷했다.
헬싱키 역에서 9시에 출발하는 펜돌리노 열차를 탄 다음 투르쿠로 간다.
헬싱키 역을 서울역에 비유하면 펜돌리노 이하 전 열차가 정차하는 파실라 역은 영등포역 정도로 취급할 수 있다. 파실라 역을
지나면서부터 선로가 서/북/동쪽으로 갈라진다. 투르쿠로 가는 란타 선으로 진입하면 에스포로 진입하고, 에스포의 서쪽 키르코누미
역에서 복선 구간이 끝난다. 헬싱키 통근 열차는 대부분 복선 구간만 운행하며, Y 열차는 키르코누미에서 조금 더 나아가기도 한다.
키르코누미를 벗어나면 단선 구간을 시속 160 정도로 달리며, 살로, 쿠피타 역에 정차한 다음 투르쿠 역에 도착한다. 가끔씩
투르쿠 항까지 가는 열차가 있으며, 투르쿠 성은 항구에서 더 가깝다.
투르쿠에 도착한 다음 투르쿠 역 매표소에서 스웨덴
룰레오-스톡홀름 간 침대차를
예약하려고 했는데, 몇 글자를 틀려 버려서 실제로 예약한 열차는 우메오-스톡홀름 간 쿠셰트가 되어 버렸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침대차와 쿠셰트는
편안함의 차이가 하늘과 땅이다. 역 앞으로 나와서 지도 한 장만 거머쥐고 투르쿠 시내를 돌아다녔다. 일단 역 근처에 있는 투르쿠 시립 미술관을 간단히 둘러본 다음, 아우라 강을 건너서 투르쿠 대성당으로 갔고, 거기서 한 템포 쉬었다. 끌고 다니던 캐리어 가방은 투르쿠 역에 넣어 두었다.
시벨리우스 박물관은 투르쿠 대성당 상당히 근처에 있다. 내가 갔을 때에는 앞에서 엄청난 공사를 하고 있었다. 학생은 상당히 저렴하게 입장할 수 있다. 시벨리우스의 생애, 투르쿠에서 열린 음악 축제, 각종 피아노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깊은 곳에는 시벨리우스의 음악과 영상물을 감상할 수 있는 자료실이 있다. 내가 갔던 시간대에는 나 혼자 있었기 때문에 자료실을 전세내고 혼자서 놀 수 있었다. 어지간한 영상 자료는 핀란드어 음성에 영어 자막이 있다.
투르쿠 대성당 주변을 빠져나온 다음 루오스타린매키 수공예 박물관으로 갔다. 1827년 투르쿠 대화재에 살아남은 가옥을 지금까지 보존해 왔으며, 지금도 당시 전통적인 복장을 입고 수공예품을 판매하고 있다. 당시 작업실이 대부분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현재에도 일부 작업실은 사용 중이다. 가옥이 보존되어 박물관이 된 만큼, 별도의 전시실은 없고 옛날 집 사이를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볼거리이다.
여기까지 둘러보니 오후 서너시. 이 때쯤 되면 박물관에 하나 들어가서 돌아보기도 애매하고, 야간 열차는 상당히 늦게 출발하기 때문에 저녁부터 먹었다. 헬싱키에서 내 배를 채워 준 골든 락스는 핀란드 전국에 깔려 있고, 피자 맛이나 종류는 상당히 실망스럽긴 하지만 무제한 음료수와 사이드메뉴의 힘으로 투르쿠에서도 버텼다. 그 다음 투르쿠 역으로 가서 탐페레로 가는 열차를 기다렸다.
투르쿠에서 탐페레로 가는 P 열차는 우리나라로 치자면 통근 열차이다. S/IC 열차가 운행하지 않는 곳에는 P 열차가 운행하며, 가장 오래 된 객차로 운행한다. 1980년대에 생산된 객차에 좌석은 여러 방향이 섞여 있고, 리클라이닝 따위는 사치고, 창문도 열려서 고속으로 주행할 때에는 기분마저 찝찝했다. 헬싱키-탐페레, 헬싱키-투르쿠와는 달리 투르쿠-탐페레 간 노선은 역간 거리도 길고 투르쿠, 로이마, 움필라, 토이알라, 탐페레에만 정차한다. 탐페레에 도착할 때가 되니 동 시간대 접속 열차 환승 안내 방송이 나왔다.
Akademy 이후 탐페레에 두 번째로 오지만, 이번에는 탐페레를 그냥 지나간다. 열차가 출발하기까지 시간이 좀 있어서 탐페레 역을 좀 둘러봤다. 평소에는 헬싱키 주변 지역에서만 놀던 Sm4가 탐페레 역에서 포리로 행선지를 바꿔 달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대전역에 동글이가 와서 대전선 경유 익산행이나 김천행 무궁화로 운행하는 풍경이다. 헬싱키 통근 열차에 쓰이는 게 아니므로 노선 글자가 표시될 자리는 비어 있다. 백야 현상 때문인지 오후 10시가 다 되었는데도 밝다.
로바니에미까지 갈 야간 열차에는 Edm 침대차, 식당차, 객차, 쿠셰트, 자동차 수송차가 연결되어 있는데 Sr1 1량이 거의 15량을 끌고 간다. 흠좀무. 8200호대 전기 기관차는 HEP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전차를 아직도 붙여 다니지만 유럽의 전기 견인 차량에는 발전차 같은 건 안 보인다.
Edm 침대차를 타고 내가 잘 곳으로 가는데 문이 도대체 안 열린다. 더워서 씻고 자긴 해야 할 텐데 문이 안 열리니 답답했다. 난 시발역에서 탄 것도 아니라서 안내도 제대로 못 받았다. 알고 보니 문 앞에 있는 흰색 카드키를 찔러 넣으면 된다. 이 카드키는 단지 문만 열 수 있고, 샤워실로 가려면 침대차 안에 있는 검은색 카드키를 사용해야 한다. 이걸 모르고 첫날에 객차를 왔다갔다하면서 엄청 헤맸다. 객차 안에는 간단한 세면대가 있고 세면대 위에 있는 찬장에 물이 좀 있다. 거기 있던 두 팩의 물을 간단하게 해치우고, 위층에 있는 사람이 이미 자고 있어서 로바니에미까지 잤다. 도착 예정 시간은 다음날 오전 8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