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펜하겐의 호스텔은 호텔과 붙어 있는 구조였고, 호스텔 방은 상대적으로 호텔보다는 안 좋은 위치에 있었다. 내가 이 호스텔을 선택한 이유 중에는 아침 식사가 있었는데, 유럽에 도착한 이후 오래간만에 고기가 들어간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대부분 호스텔의 아침식사는 빵과 시리얼 정도였는데, 고기가 나온 곳은 여기가 처음이었다. 잘 다진 돼지고기 같았고 이게 어디서 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과연 덴마크는 낙농업 국가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말리엔보르그 궁 입구
호스텔에서 아침을 챙겨먹고 궁전을 둘러보려고 스웨덴에서 덴마크로 오는 열차에서 탄 지도를 펼쳐보면서 길을 찾고 있는데, 호스텔 주인분이 거기에 쌓아놨던 다른 지도를 꺼내 주신 다음 친절하게 왕실 근위대 행진 시간까지 표시해 주셨다. 그와 함께 코펜하겐에서 둘러볼만한 곳까지 표시해 주셨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에 지도를 받아들고 근위대 행진을 보러 갔다. 스웨덴에서도 보았던 것이기에 형식에서 큰 차이는 없었지만, 장소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덴마크 쪽이 더 인상에 남았다.
덴마크 왕실 근위대 행진
이후 그 유명한 인어공주 동상을 보러 가려고 했으나, 당시에는 인어공주가 상하이에 가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인어공주는 없었다. 인어공주를 보러 가는 길에 덴마크의 저항 박물관이 있었다. 앞서 보았던 노르웨이의 저항 박물관과는 분위기가 달랐던 게, 노르웨이는 나치 독일에 맞서 싸웠고 왕가가 해외로 망명하는 등 저항 분위기가 강했으나, 덴마크는 나치 독일이 세를 키우자마자 백기를 들었기 때문에 노르웨이의 저항 운동과는 방식이 달랐다. 독일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보다는 겉으로는 순응하는 척 하면서 뒤로 저항하는 것이 덴마크의 저항 운동이었다. 그래서 덴마크의 저항 박물관 역시 거시적보다는 미시적인 성과를 위주로 소개하였다. 그 다음 몇 정거장이 아니긴 하지만 S-tog를 타고 코펜하겐 중앙역으로 갔다.
나치 점령 당시 덴마크에서 사용한 동전
인어공주 조형물
S-tog는 코펜하겐 도심과 주변 교외를 잇는 일련의 여러 철도 노선으로 구성된 광역 철도망이다. 덴마크의 간선 철도가 꽤 늦게 전철화된 것과는 달리 2차 세계 대전 주변부터 직류 1500V로 전철화되어 있으며(간선 철도는 교류 25000V), 신호 시스템이 호환되지 않는 것 역시 어느 나라를 보는 것 같다. 차량은 크게 4개 세대로 구분할 수 있으며, 현재 사용 중인 차량은 4세대 차량이 전 노선에 투입 중이다. 특이한 점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찾아보기 힘든 1축 대차와 뒤집은 항아리를 연상시키는 차량 단면이다. 대차가 1축밖에 없기 때문에 S-tog 차량 2량의 길이가 통상 철도차량의 1량 길이이며, 따라서 8량 편성의 수송력도 큰 편은 아니다. 차내에는 전자 노선도가 설치되어 있으며, 외부에 플랩 방식으로 노선 표기가 되어 있다. 알스톰 LHB/지멘스에서 합작으로 제작하였으며, 제어 소자는 지멘스 계열 제품을 사용하였으나 지멘스 옥타브와는 거리가 있는, 대구 지하철 1호선과 같은 소리가 난다.
뇌레포르트 역에 있는 ER(IC4) 열차
S-토그 열차
원래 목적은 코펜하겐에 있는 놀이공원 Tivoli 방문이었지만, 입장료의 압박으로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했다. 가던 길에 덴마크의 유대인 박물관을 발견해서 잠시 들렀다 왔다. 저항 운동 박물관에서 유대인에 대해서는 크게 비중을 다루지 않았지만, 이곳의 유대인 박물관에서는 덴마크에 살았던 유대인의 역사와 함께 2차 세계 대전 후반에 잠깐 다루어졌던 덴마크 유대인의 스웨덴 피신에 대해서 다루고 있었다. 의외로 볼 것이 많지는 않았다. 그 이후 한참을 걸어서 코펜하겐 시내에 있는 자치국 크리스티아니아의 ‘입구’까지만 조금 보다가 돌아왔다.
코펜하겐 시내
크리스티아니아 입구
올 때 잠시 이용하였던 코펜하겐 지하철은 안살도브레다의 무인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으며, 운임은 코펜하겐 지역 다른 교통 수단과 통합되어 있다. 총 2개의 운행 계통이 있으며, 도중에 노선이 분기된다.
다음 날에는 코펜하겐 교외를 돌아보기 위해서 일찍 잤다. 헬싱외르로 이동한 다음 훔레베크 역에 내려서 미술관을 관람하고, 시간이 남으면 스웨덴 말뫼를 잠깐 밟아보고 돌아오기로 했다.
헬싱외르 역 승강장
역 건물 뒤편
노면을 따라 깔려 있는
오전 일찍 일어나서 헬싱외르로 이동하였다. 헬싱외르에 간 것은 크론보르그 성을 위해서였으며, 이 성은 햄릿의 무대이기도 하다. 한동안 군사 지역으로 사용되다가 무장이 해제된 후 관광객에게 개방되었으며, 덴마크가 외레순 해협의 양안을 전부 장악하였을 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크론보르그 성에 붙어 있는 전보탑은 또 다른 볼거리이며, 산이 거의 없이 평탄한 덴마크에서 높은 곳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 중 하나이다. 성 곳곳에는 오디오 가이드가 설치되어 있는데, 블루투스 및 Wi-Fi를 사용해서 여러 언어로 되어 있는 MP3 파일을 전송받을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다. 2010년만 해도 이러한 시설을 한국 관광지에서 찾기는 힘들었는데, 요즘 한국에서는 한술 더 떠서 QR 코드를 곳곳에 박아 두었다. 참 적절한 기술의 발전을 미리 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기차를 타고 훔레베크 역으로 이동하여 근처에 있는 거의 유일한 볼거리인 루이지애나 미술관을 잠시 찾았다. 이번 여행에서 둘러본 몇 안 되는 현대 미술관이었다. 박물관 자체도 넓었고 녹지 공간도 잘 조성되어 있어서 가족들의 나들이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박물관 안의 녹지에서 스웨덴 영토가 보이는데, 실제로 해협 거리가 채 5km도 안 되기 때문에 스웨덴 휴대폰 신호가 안테나 풀로 터졌다! 덴마크에는 오래 있지는 않을 것 같아서 스웨덴 휴대폰을 그대로 들고 내려왔는데, 이게 아직 터져서 집에 전화를 걸 수 있었다. 다만 덴마크 땅에 있다 보니 충전을 하려면 스웨덴으로 다시 올라가야 한다.
훔레베크 역
루이지애나 미술관 야외 조형물
이쯤 한 다음 카메라 배터리를 사기 위해서 내친김에 스웨덴까지 올라갔다 내려왔다. 코펜하겐보다는 말뫼가 물가가 싸긴 한데, 문제는 이 싸다는 것이 코펜하겐에서 X 크로네라면 말뫼에서 X 크로나라는 식이라서, 그다지 비싼 게 아니라면 차익을 기대하기 힘들다. 말뫼에서 건전지 4개를 사는데, 건전지 값이 50크로나였지만 덴마크 크로네 지폐밖에 없어서 결국 출혈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오덴세나 오르후스쯤 가면 같은 건전지 4개가 35크로네였다! 이런 일을 여러 번 당한 이후에는 새 카메라를 살 때 첫 조건은 충전지 사용이 되었다.
말뫼 중앙역. 사진 찍을 당시에는 시티 터널 공사 중이었다.
승강장
또 다른 승강장
내일은 오덴세를 찍고 오르후스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날이며, 오르후스 이후부터는 돌아다니는 게 조금은 지겨워지기도 해서 일정의 밀도를 급격하게 낮추기로 하였다. 또한 독일쯤 들어오니까 기상천외한 북유럽 물가에서 그나마 현실적인 물가가 된다는 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코펜하겐 중앙역의 ME 기관차
(예고: 2010년 유럽 여행기가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덴마크 오덴세/오르후스 편이 끝난 후 2010년 독일편은 한 글에 모아서 쓸 예정이며, 2011년과 2012년 여행기는 2010년 여행기가 끝난 후에 쓸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