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서 짐을 싸고 체크아웃을 하러 프론트로 갔다. 2005년 호주에서 첫 선을 보인 ‘돌아올 때 짐 더 줄이기’ 스킬은 이번에 좀 불안불안했다. 여태까지는 해외 여행을 갔다 오면서 짐이 거의 같거나 줄어드는 게 대부분이지만, 이번 비치타올은 제대로 크리다. 게다가 ‘오 한국 만화다’하면서 충동구매했던 한국 만화책들의 부피는 오늘따라 웬수같던지. 아무튼 체크아웃을 하고 안전 보관소 열쇠를 맡기려는데 갑자기 웬 종이를 내놓으란다. 안전 보관소 열쇠 종이가 분명히 어디 있었을 텐데 하면서 종이를 넣어뒀을법한 곳을 다 뒤졌다. 다행히도 종이를 찾아서 보증금은 돌려받을 수 있었다.
별 하나짜리 Catalina Park 호텔에 작별 인사를 하고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갔다. 오전 9시경이라서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었고, 나와 같이 공항으로 가려는 사람들이나 좀 있었다. 가까스로 짐을 챙긴 가방을 버스 화물칸에 밀어넣고 공항까지 약 30분 정도를 자다 갔다. 카나리아 공항에서 체크인을 끝낸 다음 마드리드까지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사촌동생 선물할 카나리아 인형과 카나리아 제도를 나타내는 장식품을 좀 골라잡았다.
이베리아 항공 비행기를 타니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 T4s에 떨어졌다. 대한항공 비행기를 잡으려면 T1까지 저 멀리 가야 하는데, 그 과정이 좀 복잡하다. 일단 T4s에 내린 다음 지하로 내려가서 T4로 가는 무인 철도를 타야 한다. 제조사 패찰이 어디 달려 있을까 내심 궁금했는데 의문을 풀어 줄 무언가는 안 보였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내린 다음 패찰을 찾아보려니까 빨리 내리라는 협박성 멘트 때문에 모른 채로 내렸다. T4를 다시 빠져나와서 T1/2/3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 타면 된다. 이번에도 또 안내방송에 낚여서 T2에 내린 다음 무빙워크를 걸어서 T1 저 구석에 있는 대한항공 카운터로 갔다.
게이트로 들어가면서 보안 검색을 거치는데, 이게 또 같은 유럽이지만 독일과는 달랐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벗어날 때 내 주머니에 노키아 N810에서 나오는 케이블을 묶는 가는 철사가 들어 있었는데, 이 철사가 보안 검색에 걸려서 5분 가까이 지체된 기억이 났다. 반면 스페인에서는 엄청나게 절차가 허술했다. 대강 손으로 뭔가를 더듬더니 아무것도 없으니 보내 줬다. 각종 액체들 가지고 벌인 잠깐의 소동은 둘째쳐도. 더 충격적으로, 스페인에 들어올 때 썼던 입국심사 카드의 출국용 부분을 여권 심사관이 가져가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유럽으로 들어올 때 뭔가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 때 가서 볼 일이다. 난 분명히 심사관이 놓칠까봐 카드를 보여줬지만 안 가져갔다. 어쨌든 스페인 출국 스탬프를 받고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 터미널 A를 전ㅋ세ㅋ내서 놀고 있었다. 가게들도 문을 다 닫았고 비행기 출발까지는 시간 여유가 있어서 사람도 없었다.
열 시간에 가까운 비행 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서 공항철도 직통열차를 잡아 타러 먼 거리를 걸어갔다. 도착해 보니까 날짜는 그새 하루 지나 있었고, 시간은 오후 4시에 가까웠다. 긴장된 남북 관계 탓인지 북한 영공을 살짝 스치지도 않고 돌아갔고, 암스테르담에서 지연된 탓인지 인천에도 예정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도착했다. 한 시간 배차간격의 직통열차를 놓칠라 승차권을 빨리 사서 플랫폼으로 뛰어들어갔다.
직통 열차를 타 보니 왜 공항철도가 공기철도인 줄 알았다. 한 칸에 나를 포함해서 일본인 관광객 4명과 한국인 두 명밖에는 없었고, 다른 칸도 상황이 다르지는 않았다. 로템 패찰과 와이브로 사용 가능이라는 말이 외롭게 느껴지기만 했다. GPS를 통해서 지상 구간의 속도를 다 재어 보아도 100km/h를 넘는 구간이 참 드물었다. 영종대교 구간에서 80을 못 넘는 건 둘째쳐도, 전체적인 평균 속도가 개판 오분 전이니 누가 탈까 의문이 든다.
작년 프랑크푸르트 왕복 대한항공 마일리지를 놓친 게 억울해서라도 이번에는 스카이패스를 만들어서 마드리드행 마일리지를 꿀꺽했다. 스페인에서 대한항공 예약을 하려고 하니 도대체 이놈의 ActiveX는 사람 괴롭히기 십상이었고, 때마침 버박 업데이트와 맞물려 키보드 보안이 꼬여서 한국 와서 예약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 대한항공 해외 홈페이지에서는 국내선 예약을 하는 법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 보니 공철 맞은편에서 9호선 안내판과 전광판이 기다리고 있었고, 개통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했다고 기억한다. 부산 가는 6시 40분 비행기를 잡아 타고 집으로 왔다.
이번 여행에서 제대로 느낀 점이라면, 노키아가 왜 오픈소스 진영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싶어하는지, 왜 이미지 마케팅에 신경쓰는지, 왜 트롤텍을 인수했는지 알 수 있는 자리였다. Quim Gil의 폭탄선언 ‘maemo는 Qt로 간다’는 말 한 마디에 그놈과 KDE 사람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그놈 사람들은 당황한 나머지 ID 패치를 만들어서 Qt 로고를 그놈 로고로 가려 버렸고, KDE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신난다는 말을 언급하기를 자제했다.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오픈소스 사람들은 이미지 마케팅에 약하다. 누가 오픈소스에 동참하고 누가 오픈소스를 배신하는 등의 몇 마디에도 쉽게 바뀌는 게 오픈소스 사람이다. cdrecord나 X.org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픈소스 사람들은 순수성, 이미지를 상당히 좋아한다. 어쩌면 노키아는 이 점을 노리고, 오픈소스 진영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 접근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많이 들었다.
어쩌면 오픈소스를 둘러 싼 이미지 마케팅의 정점에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이 있을 수도 있다. Qt가 GPLv3/LGPL로도 공개되면서 리처드 스톨만도 ‘Qt는 이제 괜찮다’고 인정했고,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에서 각종의 스티커를 공급하는 게 좀 신기해 보일 수도 있다. Bad Vista와 GPLv3 스티커, Linux Inside 스티커는 일치감치 동이 나서 행사장 주변 식당까지 습격했다. 오픈소스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데 각종 스티커와 티셔츠로 치장한다는 점, 그 둘의 주목 효과가 크다는 점을 잘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우리나라 개발자들도 이런 행사에 많이 참여해서 영향력과 지명도를 키워 놔야 한다. Akademy/GUADEC은 오픈소스 개발자들이 교류할 수 있는 드문 자리 중 하나다. 각종 파티에 참가할 체력도 미리 키워 놔야 파티에서 흘러나오는 시가 수백만원짜리 고급 정보도 낚아챌 수 있고, 사 람들이 소홀하다고 까는 CJK 지원 역시 ‘우리가 계속 요구하고 소스를 보내 줘야’ 관심이라도 가진다. Albert Astals Cid와 poppler 라이브러리의 CJK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역시 테스트 케이스가 부족함을 엄청 지적했다. 이건 마치 EUC-KP 인코딩이 뭔지도, 테스트 케이스를 주지도 않고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하는 북한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물론 이런 걸 깡그리 무시하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 지원을 했다가 실제 사용자에게 욕을 먹는 사례도 왕왕 있지만.
마지막으로 Akademy 2009 단체 사진을 링크하면서 여행기는 이만 마친다. 시간이 남으면 노키아 6210 리뷰나 더 써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