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모, 그리고 노키아 N900

많은 한국 언론에서 노키아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알려 주지 않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노키아에 대해서 정말로 모른다고 장담할 수 있다. 최근 노키아가 적자를 기록하면서 한국 회사들은 마냥 좋아만 하고 있는데, 결코 좋아할 시간이 아니다. 2009년 3분기 노키아의 적자 4억 2600만 유로의 대부분은 자회사 노키아 지멘스 네트웍스의 적자 11억 7백만 유로이다. 도리어 장치 및 서비스 부문은 7억 8500만 유로 흑자를 기록했고, 노키아가 인수한 내비게이션 업체 NAVTEQ의 적자는 8천만 유로에서 6800만 유로로 줄어들었다. 즉 저렇게 겉으로 보이는 노키아의 적자는 휴대폰 판 돈 가지고 네트워크 까는 데 써서 났다고 보면 된다. 어느 한국 언론도 이걸 제대로 분석해 주지 않는다.

아무튼 현재의 노키아가 아이폰 열풍에 밀려서 휘청댄다는 말을 하기 전에, 노키아는 결코 손가락만 빨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 현재의 노키아는 여러 종류의 플랫폼을 굴리고 있다. 과거에 사용되었던 S80/S90은 이미 한물 갔으니 접어두고, 현재 노키아 휴대폰에 탑재되는 플랫폼은 S40S60이다. S60은 한국에 출시된 노키아 6210을 포함한 대부분의 스마트폰에 사용되며, S40은 UI 생김새만 비슷한 저가 휴대폰에 사용되는 플랫폼이다. 여기에 최근 N900이 나오면서 실험실 수준에 있다가 상용화된 마에모도 포함된다. 노키아 휴대폰에서 돌아가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싶다면 이 세 단어만 기억하면 된다.

심비안 OS 및 S60 플랫폼을 탑재한 휴대폰은 한국에 최근에서야 정식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나마 정보가 있긴 하지만, 마에모는 도대체 어떤 플랫폼일까? N900을 내놓으면서 마에모가 심비안을 대체할 거라는 헛소리까지 들려오는 걸로 보아 뭔가 제대로 알려진 게 없는 건 확실하다. 자 타임 머신을 돌려서 2005년으로 가 보자.

삼성전자는 당시로는 획기적이었던 무선 핸드헬드 PC 넥시오 시리즈를 내놓았다. 외부에서 무선 네트워크나 이동통신망을 통해서 인터넷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게 컨셉이었다. 11n이 나오기는 했지만, 요즘 많이 사용되는 무선 네트워크 표준 IEEE 802.11g는 2003년이나 되어서야 확정되었기 때문에 초기 넥시오들은 11MBps밖에 지원하지 못하는 802.11b를 달고 나왔다. 지금이야 무선 공유기가 많이 보급되어 있지만 넥시오가 나왔을 때에는 그렇지도 못했다. 블루투스 1.1은 2002년, 블루투스 2.0은 2004년에나 나왔기 때문에 블루투스로 휴대폰을 연결해서 무선 인터넷을 즐긴다는 건 상상도 힘들었다. 지금 넥시오가 다시 나온다면 그 때보다는 성공 확률이 높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노키아는 이걸 연구하면서 첫 인터넷 태블릿 770을 만든다.

노키아의 기업 문화는 상당히 보수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한국 휴대폰 제조사들이 눈만 깜빡하면 HD 동영상 촬영이니 AMOLED(아몰레드 아니다) 탑재, 풀터치 등의 휘황찬란한 스펙의 휴대폰을 내놓을 때, 노키아는 ‘정작 기술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박자 늦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그 대신 새 기술을 한 번 도입할 때 플랫폼까지 준비를 잘 해 오는 편이다. 첫 S60 기반 터치스크린 휴대폰인 노키아 5800이 데뷔했을 때 S60 플랫폼도 터치를 잘 지원하는 버전 5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노키아 770이 나왔던 당시에도 윈도 CE는 존재했으나, 노키아는 리눅스 기반 자체 플랫폼 마에모를 선택하였다.

대부분 리눅스 기반 모바일 플랫폼과는 달리, 마에모는 많은 부분이 자유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져 있다. 마에모 자체가 데비안을 기반으로 하는데다가, 초기 마에모 GUI를 구성했던 GTK+, 멀티미디어 프레임워크 GStreamer 역시 자유 소프트웨어이다. 어도비 플래시나 오페라(OS2007까지), 하드웨어 드라이버 등의 일부 부분만 소스가 비공개인 채로 남아 있다. 노키아가 제작한 GTK+ 기반 모바일 데스크톱 환경 Hildon은 이미 그놈 모바일의 일부로 통합되었다. 이런 식으로 자유 소프트웨어 커뮤니티와 친해지면서, 기존 존재하는 자유 소프트웨어를 쉽게 포팅하는 덤까지 따라왔다. 이 점 덕분에 마에모는 출시 초기부터 많은 소프트웨어(요샛말로 앱)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다른 리눅스 기반 모바일 플랫폼이 해 내지 못한 큰 성과이다.

애플이 2007년 아이폰으로 노키아의 뒤통수를 한 방 먹이고 있는 동안, 노키아는 S60과 마에모를 갈고 닦아 나갔다. 770의 후속작 N800 인터넷 태블릿은 2007년 1월, N800의 후속작 N810은 같은 해 11월에 출시되었다. 770의 OS2006 UI가 과장된 입체감을 강조했다면, N800의 OS2007 UI는 더 납작해졌고 N810 OS2008에 와서는 입체감은 사라지고 그라데이션을 많이 사용하였다. N800에 와서는 블루투스 데이터 통신이 추가되었고, N810은 N800과 비슷한 하드웨어를 사용하면서 하드웨어 키보드가 추가되고 액정이 개선되면서, 디자인이 좀 더 새끈해졌다.

N800과 N810은 TI OMAP2420 CPU를 사용하는데, 여기에 들어간 3D 그래픽 엔진은 드라이버 라이선스 및 관리 상태 문제로 마에모에서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같은 시기에 출시된 OMAP2420 기반 심비안 휴대폰이 3D를 잘만 쓴다는 사실은 후에 마에모 커뮤니티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이게 하는 원인을 제공해 줬다. 하지만 N800은 이동통신 모듈이 없었고, N810의 경우 WiMAX 에디션이 나중에 나오긴 하지만 미국 말고는 WiMAX 네트워크도 없어서 WiMAX 없는 N810보다 더 빨리 단종되었다.

N810을 내놓은 노키아는 제품 코드 RX-51로 알려져 있었던 다음 태블릿을 기획한다. 더 업그레이드된 OMAP3 CPU를 사용하면서, 3D 그래픽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UI 스케치가 뿌려지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전화 기능이 들어간다는 소문도 났고, RX-51이 FCC 인증을 통과할 때 쯤 N900의 스펙이 나돌기 시작했다. 기존 인터넷 태블릿 사용자들의 눈을 확 돌아가게 할 정도로 업그레이드되었다. N900이라는 말이 나올 때 쯤, 노키아는 새 태블릿을 위한 SDK를 배포하기 시작했고 여러 프로그램들이 포팅되어 저장소에서 주인을 기다리게 되었다.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마에모 서밋에서 N900을 개발자들에게 빌려 주면서 소문은 더욱 더 잘 퍼져 나갔다.

하드웨어 스펙 킹왕짱 N900과 자유도 킹왕짱 마에모에 엄청난 기대를 걸기 전에 가격 꼬리표부터 살펴보자. 영국 노키아에서 N97이 449파운드, N900은 499파운드(선주문)에 팔리고 있다. 이 가격이 다른 유로권 나라로 가면 599유로, 미국으로 가면 645달러가 된다.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에서 봤던 언락된 아이폰 3G(3GS였나 헷갈림) 가격이 500유로 후반대였으니 N900은 객관적으로도, 노키아 안에서도 상당히 비싼 축에 속한다. 마에모는 바로 이런 하드웨어 스펙이 좋은 고가 단말기에 탑재될 것이다.

N900은 첫 마에모 기반 휴대폰이라서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마에모 휴대폰이 나올지 장담할 수는 없다. 단, 하나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라면 노키아는 심비안을 버리지 않는다. 노키아는 단순히 다른 회사에도 일부 지불하는 심비안 OS의 비용(노키아가 심비안의 지분을 인수하기 전까지만 해도 여러 회사로 나뉘어 있었다)이 아까워서 심비안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게다가 최근에는 심비안 OS의 커널도 공개하였다. 정말로 심비안을 마에모로 대체할 생각이었으면 노키아는 이렇게 돈을 태우지 않는다.

어쩌면 노키아가 이렇게 자신들의 플랫폼을 기꺼이 여는 행동은 플랫폼의 관점에서 컨텐츠를 일반 재화로 만들려는 행동이다. S40 플랫폼이야 외부 프로그램은 J2ME처럼 제한된 만큼만 제공하기 때문에 플랫폼을 열어도 별 득이 없다. 이미 마에모는 Mer라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노키아 인터넷 태블릿 외의 장치로도 이식될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심비안 및 S60마저도 외부에 열리면 다른 휴대폰 제조사들이 지금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심비안을 탑재할 수 있다. 심비안 OS는 이미 여러 서드파티 제조사에도 공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키아는 이렇게 깔려 있는 자사 플랫폼을 통하여, 더 많은 장치에 자신들의 컨텐츠를 쉽게 배포할 수 있다.

이제는 휴대폰에 들어가는 하드웨어도 상향 평준화되었다. 소프트웨어 역시 하드웨어만큼 노력한다면 빨리 쫓아갈 수야 있다. 하지만 컨텐츠는 뚝딱 만들라고 해서 만들 수 없다. 진짜로 컨텐츠에 관심이 있다면 노키아처럼 먼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하는 게 도움이 된다.

카이스트 FTP: 끔찍한 신학기

들어가기 전에 배경 설명부터 하자. 카이스트 FTP 서비스는 각종 오픈소스 프로젝트를 미러링하는 서비스이다. 서비스의 운영은 전적으로 SPARCS에서 담당하며, KAIST 정보통신팀과 KT에서 하드웨어를 지원하였다. SPARCS 소유의 각종 서버들을 관리하는 휠 그룹이 있으나, 카이스트 FTP는 ‘지금까지는’ 휠과는 별도로 놀았다. FTP 관리자들이 학교에 있었을 때는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문제에 발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으나, 현재는 학교에 있는 FTP 관리자 수가 옛날만큼 못하다.

카이스트 FTP는 두 대의 서버(ftp, ftp2)로 구성되어 있다. ftp는 옵테론 265를 두 개 사용하며 총 하드디스크는 2.5TB RAID 5이다. ftp2는 제온 5110 하나에 4TB RAID 5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RAID 5 어레이는 하드디스크 12개로 구성되어 있다. Apache, 데비안, 모질라, 우분투 외 7개의 주요 미러는 ftp에서 돌아가고, 그 외의 미러는 ftp2에서 돌아간다. 이 두 시스템은 독립적이면서도 의존적이다.

SPARCS 서버실에 살고 있는 카이스트 FTP

SPARCS 서버실에 살고 있는 카이스트 FTP.

사진은 SPARCS 서버실이다. SPARCS 서버 왼쪽에는 학교에서 설치해 둔 기숙사 및 1호관 지역으로 가는 네트워크 케이블이 밀집해 있고, 여기에서 광케이블 하나를 따서 SPARCS 서버 및 동아리방으로 네트워크를 공급한다. 맨 위에 보이는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은 서버가 ftp이고, 은색 랙 아래에 가려서 안 보이는 서버가 ftp2이다.

사건의 발단은 올해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ftp2의 하드디스크 중 하나가 고장나서 한 동안 ftp2는 하드디스크 11개로 돌아갔다. 고장난 하드디스크는 7월 중에 수리를 받아서 시스템에 장착한 다음 레이드 재구성을 시도하였다. 당시는 방학이었기 때문에 서버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나 또한 ‘수리를 받았으니 레이드 재구성이 되어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하드디스크를 꼽은 채로 그냥 뒀다.

서비스는 뒤에서 굴러가는 듯 했으나, 기대와는 달리 시간이 지나도 레이드가 예상대로 재구성되지 않았다. ‘새로 수리받은 하드디스크가 왜 고장났을까’ 반신반의하는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ftp2의 하드디스크가 하나 더 터졌다. RAID 5는 하드디스크가 하나까지는 터져도 무방하나, 두 개 터지면 어레이를 사용할 수 없다. 기왕 손상된 건 어쩔 수 없으니 더 이상의 손상을 막기 위해서 ftp2를 9월 초에 껐고, 새로 수리받자마자 고장난 하드디스크도 같이 빼 두었다. 바로 이 때부터 Sage와 같은 일부 서비스의 미러링이 중단되었다.

ftp 쪽도 영 심상찮았다. 하드디스크 하나가 SMART 오류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SMART 오류가 한 번 발생한 하드디스크는 언젠가는 터지고 마는 시한폭탄이라고 보면 된다. ftp2의 하드디스크 교체와 어떻게 잘 맞물려서 ftp의 하드디스크가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ftp2의 고장난 하드디스크를 RMA 부치려고 생각했던 날 고장을 예고한 ftp의 하드디스크가 결국 터졌다. ftp2 쪽 하드디스크는 보증 기간이 남아 있었으나, ftp 쪽 하드디스크는 보증기간이 얼마 없어서 새로 사야만 했다.

이번 하드디스크 고장 때문에 서비스를 중단한 기간이 꽤나 길었기 때문에, 다음에 하드디스크가 터졌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예비용 하드디스크를 같이 샀다. 새 하드디스크를 ftp와 ftp2에 밀어넣은 다음, ftp는 단순히 레이드를 재구성시켰다. ftp2는 고장난 디스크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어레이를 지운 다음 다시 구성했다. 4TB xfs 파티션을 잡은 다음, 미러링되는 파일이 들어갈 폴더를 다시 잡아 주고 알아서 동기화되길 기다렸다. 처음부터 새로 받아오는 거라서 동기화 시간이 좀 오래 걸렸다.

ftp2 레이드 초기화 중

ftp2 레이드 초기화 중. 지금은 다 끝났다.

현재 카이스트 FTP 서비스는 정상 작동하고 있다. 카이스트 FTP 고객에게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면, kr.archive.ubuntu.com을 다음 미러로 넘기기로 결정하였다. 우분투 한국 로코팀 관계자가 kr.archive.ubuntu.com을 다음으로 보내는 게 어떨까 먼저 제안하였고, 잠깐 메일링이 돈 다음에 그냥 다음으로 넘기기로 했다. 우분투 미러는 카이스트 FTP의 트래픽 잡아먹는 괴물주요 고객이다. 사용량을 분석해 보면 우분투와 페도라가 각각 1/3씩, 나머지 전부의 합이 1/3이다. 이 1/3을 다른 미러가 가져가 준다면 우리 미러의 다른 사용자들이 더 득을 볼 것이라고 확신한다.

노키아 6210으로 할 수 있는 일 – 리눅스와 동기화

대한민국에 팔리는 휴대폰 중 리눅스에서 사용할 수 있는 폰이 얼마나 있을까? 거의 없다에 올인이다. 대부분의 국내 제조사 휴대폰은 윈도를 벗어나면 먹통이 된다. 비트핌과 같은 서드파티 유틸리티 중 국내 휴대폰을 제대로 동기화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은 없다. 그나마 윈도 모바일을 탑재한 스마트폰은 다른 운영체제에서 동기화가 된다. 그리고 노키아 6210 역시 리눅스에서 동기화를 지원한다. 리눅스 사용자라면 놓치면 안 된다.

우리가 사용할 도구는 MultiSync이다. 첫 페이지에서 눈여겨볼 항목은 SyncML 지원이다. 과거 SPH-W2100을 리눅스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패킷 캡처를 해 본 결과 동기화 통신에는 SyncML을 쓰고 있는 것 같지만, 동기화 모드로 진입시키기까지 과정이나 어떤 식으로 SyncML을 주고받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문서화되지 않았다. 반면 해외 휴대폰들은 국내에 비하면 상황이 상당히 나아서 서드파티 도구로도 충분히 동기화시킬 수 있다.

이제 휴대폰을 동기화시키려면 MultiSync와 함께 각각 데스크톱 환경에 특화된 PIM(개인 정보 관리자) 프로그램을 설치해야 한다. KDE Kontact를 설치하면 전자 우편 프로그램 KMail, 주소록 프로그램 KAddressBook, 달력 프로그램 KOrganizer, 메모 프로그램 KNotes를 비롯한 KDE PIM 프로그램이 설치된다. MultiSync는 이 프로그램과 휴대폰 사이에서 데이터를 동기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나는 현재 데비안을 사용하고 있고, 어지간한 곳에서는 데비안이나 우분투가 크게 비슷하기 때문에 우분투 쪽의 가이드를 참고하였다. PIM 패키지를 설치했다면, MultiSync와 각종 플러그인, GUI 프로그램 패키지를 설치하면 된다. multisync-tools는 필수 패키지이고, opensync-plugin-syncml, libsyncml-tools는 휴대폰과 연결하기 위한 SyncML 플러그인이다. opensync-plugin-kdepim은 KDE PIM과 동기하기 위한 플러그인이다. GUI를 좋아한다면 multisync0.90 패키지를 같이 설치해 주자.

모든 패키지 설치가 끝났다면 msynctool –listplugins를 실행시켜 설치 상태를 확인하자. 설치가 제대로 되었다면 SyncML, KDE PIM 플러그인이 있다고 나타난다. 그 다음에는 휴대폰을 등록해야 한다. 상세한 설명은 가이드에 나와 있으므로, 여기서는 개요만 다루겠다. 우선 동기화 그룹을 설정한다. 동기화 그룹 안에는 무엇과 무엇을 동기화시킬지를 등록하면 된다. 새 동기화 그룹을 만든 다음, KDE PIM과 SyncML을 구성원으로 등록한다. 그 다음 SyncML 쪽을 설정한다. USB나 블루투스 둘 다 지원하므로 취향에 따라서 선택하면 된다.

8월 28일 내용 추가: 굳이 CLI 상에서 동기화 설정을 할 필요가 없다. 아래의 GUI 프로그램 multisync0.90을 처음 실행시키면 빈 창이 뜬다. 위에 있는 ‘추가’를 눌러서 동기화 그룹의 이름을 지어준 다음, 그룹 추가 후 ‘편집’을 누른다. 어떤 동기화 구성요소를 추가할 지 물어보는데, SyncML OBEX Client와 KDE Desktop을 추가시켜주면 된다. KDE Desktop 쪽은 설정할 필요가 없지만, SyncML OBEX 클라이언트는 수정해 줘야 한다. 편집을 누른 다음 SyncML OBEX Client 쪽에서 identifier를 PC Suite로, USB 연결을 사용한다면 인터페이스의 숫자를 2에서 5로 바꿔 주면 된다. 대신 블루투스 연결을 사용한다면 휴대폰의 블루투스 MAC 주소를 지정해 줘야 한다. *#2820#(*#bta_#)을 누르면 블루투스 주소가 뜬다.

여기까지 과정을 잘 따라왔다면 명령행으로 동기화하거나 앞서 설치한 multisync0.90 GUI 도구를 실행시켜서 동기화하면 된다. GUI는 상당히 간단해서, 휴대폰을 연결한 다음 ‘새로 고침’만 누르면 동기화가 시작된다. 참 쉽죠?

multisync GUI 도구

multisync GUI 도구

상황에 따라서 오류 메시지를 내고 동기화가 끝날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오류 메시지가 떴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한다. 동기화가 끝난 후 PIM 프로그램을 실행시켜 보면 정보가 업데이트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래는 설정을 모두 완료한 다음 노키아 6210과 컴퓨터를 동기화시키는 장면이다.

동기화가 끝났으면 KAddressBook을 실행시켜서 전화번호를 확인해 보자. 처음에는 아무것도 입력하지 않았고, 동기화한 이후 휴대폰의 연락처가 모두 컴퓨터로 입력되었다. 아직까지 KDE PIM 쪽은 많이 사용해 보지 않아서 번역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시간과 노력이 해결해 줄 문제이다. 또는 번역 파일을 보내 주면 얼마든지 커밋해 줄 수 있다. KAddressBook을 사용해서 얼마든지 연락처 정보를 편집할 수도 있고, 적당한 프로그램만 깔려 있으면 휴대폰에 손 안 대고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낼 수도 있다.

KAddressBook으로 본 전화번호부

KAddressBook으로 본 전화번호부

리눅스를 쓴다면 당장 노키아 6210을 사서 오픈소스 PIM 도구의 강력함을 직접 체험해 보기 바란다.

GCDS 2009 여행기 – 일곱째날(귀국)

호텔에서 짐을 싸고 체크아웃을 하러 프론트로 갔다. 2005년 호주에서 첫 선을 보인 ‘돌아올 때 짐 더 줄이기’ 스킬은 이번에 좀 불안불안했다. 여태까지는 해외 여행을 갔다 오면서 짐이 거의 같거나 줄어드는 게 대부분이지만, 이번 비치타올은 제대로 크리다. 게다가 ‘오 한국 만화다’하면서 충동구매했던 한국 만화책들의 부피는 오늘따라 웬수같던지. 아무튼 체크아웃을 하고 안전 보관소 열쇠를 맡기려는데 갑자기 웬 종이를 내놓으란다. 안전 보관소 열쇠 종이가 분명히 어디 있었을 텐데 하면서 종이를 넣어뒀을법한 곳을 다 뒤졌다. 다행히도 종이를 찾아서 보증금은 돌려받을 수 있었다.

별 하나짜리 Catalina Park 호텔에 작별 인사를 하고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갔다. 오전 9시경이라서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었고, 나와 같이 공항으로 가려는 사람들이나 좀 있었다. 가까스로 짐을 챙긴 가방을 버스 화물칸에 밀어넣고 공항까지 약 30분 정도를 자다 갔다. 카나리아 공항에서 체크인을 끝낸 다음 마드리드까지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사촌동생 선물할 카나리아 인형과 카나리아 제도를 나타내는 장식품을 좀 골라잡았다.

이베리아 항공 비행기를 타니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 T4s에 떨어졌다. 대한항공 비행기를 잡으려면 T1까지 저 멀리 가야 하는데, 그 과정이 좀 복잡하다. 일단 T4s에 내린 다음 지하로 내려가서 T4로 가는 무인 철도를 타야 한다. 제조사 패찰이 어디 달려 있을까 내심 궁금했는데 의문을 풀어 줄 무언가는 안 보였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내린 다음 패찰을 찾아보려니까 빨리 내리라는 협박성 멘트 때문에 모른 채로 내렸다. T4를 다시 빠져나와서 T1/2/3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 타면 된다. 이번에도 또 안내방송에 낚여서 T2에 내린 다음 무빙워크를 걸어서 T1 저 구석에 있는 대한항공 카운터로 갔다.

게이트로 들어가면서 보안 검색을 거치는데, 이게 또 같은 유럽이지만 독일과는 달랐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벗어날 때 내 주머니에 노키아 N810에서 나오는 케이블을 묶는 가는 철사가 들어 있었는데, 이 철사가 보안 검색에 걸려서 5분 가까이 지체된 기억이 났다. 반면 스페인에서는 엄청나게 절차가 허술했다. 대강 손으로 뭔가를 더듬더니 아무것도 없으니 보내 줬다. 각종 액체들 가지고 벌인 잠깐의 소동은 둘째쳐도. 더 충격적으로, 스페인에 들어올 때 썼던 입국심사 카드의 출국용 부분을 여권 심사관이 가져가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유럽으로 들어올 때 뭔가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 때 가서 볼 일이다. 난 분명히 심사관이 놓칠까봐 카드를 보여줬지만 안 가져갔다. 어쨌든 스페인 출국 스탬프를 받고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 터미널 A를 전ㅋ세ㅋ내서 놀고 있었다. 가게들도 문을 다 닫았고 비행기 출발까지는 시간 여유가 있어서 사람도 없었다.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 터미널 A 전세 인ㅋ증ㅋ

열 시간에 가까운 비행 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서 공항철도 직통열차를 잡아 타러 먼 거리를 걸어갔다. 도착해 보니까 날짜는 그새 하루 지나 있었고, 시간은 오후 4시에 가까웠다. 긴장된 남북 관계 탓인지 북한 영공을 살짝 스치지도 않고 돌아갔고, 암스테르담에서 지연된 탓인지 인천에도 예정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도착했다. 한 시간 배차간격의 직통열차를 놓칠라 승차권을 빨리 사서 플랫폼으로 뛰어들어갔다.

공철 직통열차 승차권 인ㅋ증ㅋ

공철 직통열차 승차권 인ㅋ증ㅋ

직통 열차를 타 보니 왜 공항철도가 공기철도인 줄 알았다. 한 칸에 나를 포함해서 일본인 관광객 4명과 한국인 두 명밖에는 없었고, 다른 칸도 상황이 다르지는 않았다. 로템 패찰과 와이브로 사용 가능이라는 말이 외롭게 느껴지기만 했다. GPS를 통해서 지상 구간의 속도를 다 재어 보아도 100km/h를 넘는 구간이 참 드물었다. 영종대교 구간에서 80을 못 넘는 건 둘째쳐도, 전체적인 평균 속도가 개판 오분 전이니 누가 탈까 의문이 든다.

김포공항햏 직통열차

김포공항햏 직통열차

작년 프랑크푸르트 왕복 대한항공 마일리지를 놓친 게 억울해서라도 이번에는 스카이패스를 만들어서 마드리드행 마일리지를 꿀꺽했다. 스페인에서 대한항공 예약을 하려고 하니 도대체 이놈의 ActiveX는 사람 괴롭히기 십상이었고, 때마침 버박 업데이트와 맞물려 키보드 보안이 꼬여서 한국 와서 예약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 대한항공 해외 홈페이지에서는 국내선 예약을 하는 법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 보니 공철 맞은편에서 9호선 안내판과 전광판이 기다리고 있었고, 개통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했다고 기억한다. 부산 가는 6시 40분 비행기를 잡아 타고 집으로 왔다.

이번 여행에서 제대로 느낀 점이라면, 노키아가 왜 오픈소스 진영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싶어하는지, 왜 이미지 마케팅에 신경쓰는지, 왜 트롤텍을 인수했는지 알 수 있는 자리였다. Quim Gil의 폭탄선언 ‘maemo는 Qt로 간다’는 말 한 마디에 그놈과 KDE 사람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그놈 사람들은 당황한 나머지 ID 패치를 만들어서 Qt 로고를 그놈 로고로 가려 버렸고, KDE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신난다는 말을 언급하기를 자제했다.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오픈소스 사람들은 이미지 마케팅에 약하다. 누가 오픈소스에 동참하고 누가 오픈소스를 배신하는 등의 몇 마디에도 쉽게 바뀌는 게 오픈소스 사람이다. cdrecord나 X.org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픈소스 사람들은 순수성, 이미지를 상당히 좋아한다. 어쩌면 노키아는 이 점을 노리고, 오픈소스 진영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 접근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많이 들었다.

어쩌면 오픈소스를 둘러 싼 이미지 마케팅의 정점에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이 있을 수도 있다. Qt가 GPLv3/LGPL로도 공개되면서 리처드 스톨만도 ‘Qt는 이제 괜찮다’고 인정했고,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에서 각종의 스티커를 공급하는 게 좀 신기해 보일 수도 있다. Bad Vista와 GPLv3 스티커, Linux Inside 스티커는 일치감치 동이 나서 행사장 주변 식당까지 습격했다. 오픈소스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데 각종 스티커와 티셔츠로 치장한다는 점, 그 둘의 주목 효과가 크다는 점을 잘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행사장 근처 식당을 점령한 Bad Vista 스티커.

행사장 근처 식당을 점령한 GPLv3 스티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우리나라 개발자들도 이런 행사에 많이 참여해서 영향력과 지명도를 키워 놔야 한다. Akademy/GUADEC은 오픈소스 개발자들이 교류할 수 있는 드문 자리 중 하나다. 각종 파티에 참가할 체력도 미리 키워 놔야 파티에서 흘러나오는 시가 수백만원짜리 고급 정보도 낚아챌 수 있고, 사 람들이 소홀하다고 까는 CJK 지원 역시 ‘우리가 계속 요구하고 소스를 보내 줘야’ 관심이라도 가진다. Albert Astals Cid와 poppler 라이브러리의 CJK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역시 테스트 케이스가 부족함을 엄청 지적했다. 이건 마치 EUC-KP 인코딩이 뭔지도, 테스트 케이스를 주지도 않고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하는 북한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물론 이런 걸 깡그리 무시하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 지원을 했다가 실제 사용자에게 욕을 먹는 사례도 왕왕 있지만.

마지막으로 Akademy 2009 단체 사진을 링크하면서 여행기는 이만 마친다. 시간이 남으면 노키아 6210 리뷰나 더 써 보려고 한다.

GCDS 2009 여행기 – 여섯째날 (섬 여행)

이제 마지막 날에 예정되어 있는 섬 여행만 마치면 내 GCDS 일정은 여기서 끝난다. BoF 세션으로 분위기가 넘어오면서 전체적인 행사의 밀도가 좀 낮아졌고(BoF 자체의 특성이기도 하다), 들을만한 것들이 점점 사라지면서 재미가 없어졌다. 오늘도 BoF가 일부 있긴 한 것 같은데, 대부분 참가자들이 여행에만 신경이 쓰여 있어서 BoF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고 했다. 우왕ㅋ굳ㅋ.

목요일에도 일단 대학교로 갔다. 오전에도 BoF가 몇 개 열리긴 했지만 나는 해킹 룸에 있었다. 대개의 BoF 진행자들이 오후에 있을 섬 여행 때문에 제대로 준비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오후 2시에 전세 버스 3대를 빌려서 여행을 시작했다. 섬의 동쪽 해안을 돌고 오는 코스이다. 도중에 해변가도 좀 거치고, 마을에도 한 번 들렀다 갔다. 카나리아 제도의 태양은 엄청 이글거리기 때문에 SPF 35 썬크림도 준비해 갔다. 그 덕분에 피부가 타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첫 목적지는 섬 남쪽에 있는 Playa del Inglés 해안이다. 해석하면 영국인 해안이라는 뜻이다. 이곳 해안은 사하라 사막에서 날려온 모래가 해수욕장을 이루기 때문에 해안가를 얼핏 보면 사막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실제로 해수욕장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막 비스무레한 게 바로 보였다. 과연 집 앞 광안리나 해운대 바닷가에 비해서 어떤 점이 다를까 생각하고 버스를 타고 가는데, 결국 사고가 터졌다. 내가 탄 버스가 터졌다.

복불복도 이런 복불복이 따로 없다

복불복도 이런 복불복이 따로 없다

작년 Akademy 때에는 브뤼셀 공항이 파업했고, 2007년에는 하필 글래스고에 폭탄 테러가 개막식 날 터지는 통에 ‘올해는 어떤 복불복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찾아왔는데, 하필 여행 맨 마지막 날에 터질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아무튼 GC-1 고속도로 위에서, 약 30도의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선크림을 잘 챙겨왔다) 대체 버스를 기다리는 건 나름대로 스릴있었다. 내 앞에는 해수 담수화 공장이 무심한 듯 시크하게 서 있었다. 알고 보니 저기서 섬에 사용되는 식수를 공급하고 있었다.

님들 저는 결코 싸대가 아닙니다

님들 저는 결코 싸대가 아닙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한창 해가 뜰 때인 오후 2시경에 해변에 도착했다. 해변가에 바로 도착하기 전에 앞서 이야기했던 사막과 해안의 조화를 먼저 구경하였다. 흔히 봐 왔던 사막에 대한 고정관념을 과감히 깰 수 있었다. 이쪽 바닷가를 잠시 둘러본 다음 진짜 해변가에 도착했다. 사막에서 날려온 모래 때문인지 모래 자체는 매우 고왔다. 한술 더 떠서, 내 숙소 주변 해안가보다 관리가 더 잘 된다는 인상도 받았다. 해변의 한 쪽 끝은 누드 비치가 있었고(진입로를 몰라서 가 보지는 못했다), 해안가를 벗어나면 각종 음식점과 관광 안내소가 있었다.

관광 안내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명찰을 걸고 있었다. 바람직해 보이는 현상이다. 근처에 있는 식당들은 다양한 메뉴를 걸고 장사를 하고 있었고, 기념품 가게에서는 카나리아 제도를 상징하는 여러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다음 일정은 산 중턱 마을에 올라가는 건데, 저녁을 먹는다는 건지 만다는 건지 언급이 없어서 일단 여기에서 치킨 커리와 칵테일로 저녁을 해결했다. 열대 과일과 음료의 조화는 지금도 잘 기억난다. 물론 무알콜 칵테일이었다.

흔히 보기 힘든 사막과 해안의 조화.

야호 해안가다!

저 멀리 누드 비치도 있었다. 물론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해안가에 밀집해 있는 관광 안내소와 식당.

오후 6시에 Agüimes 마을을 향해서 출발했다. 출발하는 동안 동지들을 찾기는 아주 쉬웠다. 자유 소프트웨어 쪽 사람들은 꼭 하나씩 티를 낸다. 예를 들면 가방이라든가, 비치 타올이라든가, 티셔츠 등이다. 6시보다 살짝 일찍 돌아와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근처 사람들과 함께 일명 ‘geekspotting’을 즐겼다. 내가 탔던 고장난 버스도 수리되어 돌아왔는데, 난 그 버스에 다시 타야 하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일부 인원들이 실종된 것 같아서 살짝 혼선이 생겼다. 이 과정에서 참가자들의 이름을 검사하는데, 드디어, 여기 스페인에서, 내 이름을 내가 의도한 대로 부르지 못한 사람이 등장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영어’를 기준으로 로마자로 이름을 적는데다가, 같은 로마자 또한 언어마다 읽는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나도 여기에서 제대로 충격을 받아서 ‘로마자 표기법과 영어는 상관없다’는 내 생각을 확실히 했다. 그저 영어권 외국인 때문에 로마자 표기법을 손질하자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답답하다.

하여튼 Aguimes 마을은 섬 중앙 화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고, 지대가 높은 만큼 이글거리는 태양을 피할 수 있어서 농업이 발달할 수 있었다. 현재 이 마을은 전통적인 생활 양식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마을을 따라다니면서 오래된 집을 둘러보았고, 나무가 있는 공터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Aguimes 마을 한복판

Aguimes 마을 한복판

이 마을에는 볼거리가 많았다. 옛날에 지어진 집과 좁은 거리, 그리고 마을 한복판에 있는 큰 성당같이. 하지만 산을 타고 올라가니까 카메라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나마 찍은 사진들은 하나같이 이가 빠져 있거나 색이 빠져 있어서, 나중에 후보정으로도 영 무리가 올 것 같아서 여기서는 사진을 많이 찍지 못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카메라는 모두 고쳤지만, 볼거리가 많았는데 남겨 오지 못한 건 매우 아쉽다.

돌아오는 길에 사탕 수수를 재배했던 Ingenio를 거쳐서 왔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가이드는 재미나는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다. 과거 비행기가 다니지 않았던 시절 이 섬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유럽을 이어 주는 곳이었다. 세 대륙 사이를 이동하려면 중간에 선원들도 쉬어 주고 배에 물자도 보급해야 했는데, 카나리아 제도는 이 목적으로 딱 적당했다. 섬에는 비가 전혀 오지 않기 때문에 농사를 하려면 관개 시설이 필수적이다. 바나나나 토마토 등의 작물이 카나리아 제도의 햇볕을 받으면서 엄청 자라고 있었다. 지금은 아프리카에서 더 싼 가격으로 농작물이 수입되고 있어서 가격에서는 밀리는 듯 하지만 품질로 승부를 보고 있다고 한다.

카나리아 제도에는 산업 시설이 따로 없기 때문에, 농업이 쇠퇴한 이후 관광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옛날에 있었던 거대한 플랜테이션은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호텔과 아파트 단지로 변신했다. 옛날에 농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지금 직 간접적으로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 때문에 카나리아 제도의 관광 사업은 쉽게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바로 지금 카나리아 제도는 관광 수입의 감소 때문에 실업률이 증가해서 문제라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버스는 호텔이 있는 Santa Catalina 정류장으로 들어갔다. 많은 참가자들이 사실상 섬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기 때문에 서로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여행을 끝냈다. 나도 다음날이 출국이기 때문에 이쯤에서 얼굴을 아는 사람들과는 서로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처음 여기로 들어올 때는 짐이 적은 편이었는데, 어느새 추가된 기념품과 비치 타올 때문에 가방은 그새 불어났다. 빨리 집에 가서 이것들을 모두 풀어놓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밤에 짐을 대강 싸고, 나머지 짐들은 아침에 챙겼다. 다시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서 긴 긴 여행을 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까지 들어오는 동안 있었던 재미난 일은 다음 편에서 이야기할 것이다.